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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나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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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티카카 Jan 16. 2023

동파(凍破)의 추억

아파트 관리 사무소에서 안내 방송 드립니다
겨울철 한파로 인한 동파가 발생할 수 있으니 안전조치를 부탁드립니다.
수도를 조금 열어서 수도가 얼지 않도록 방지해 주시길 바랍니다.


10년 전 겨울.

추워지기 시작하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방송 안내가 끊이지 않았다. 복도식 아파트 수도관은 외부에 노출되어 있었고 동파가 잦았다. 미국 드라마를 보면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색색의 조명으로 집을 꾸미는 장면이 나온다. 연말을 앞둔 우리 아파트는 집집마다 수도함 꾸미기(?)에 열중한다. 각기 다른 크리스마스트리처럼 수도함도 가구마다  다르다. 택배에 이용하는 뽁뽁이와 헌 담요로 수도함을 꽉꽉 채우는 집은 초보다. 고수는 수도함 문까지 보온한다. 문에 박스를 대놓은 집도 있고 두꺼운 스티로폼을 붙여놓는 집도 있다.


수도관이 얼어 터지면 겨울은 힘겨워진다. 당연하던 설거지와 세탁 그리고 아이 목욕이 멈춰진다. 제일 심각한 건 변기다. 화장실 물도 수도와 연결되어 있다는 걸 겨울을 지나며 알게 되었다. 어른은 어찌 참는다 해도 수시로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아이들이 참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물은 꼭 필요하다. 나는 아궁이 불씨 지키는 며느리처럼 수도관을 사수하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웠다. "똑. 똑. 똑" 모두가 잠든 밤 수도꼭지에서는 한 방울씩 물이 떨어진다. 소리에 예민해 무소음 시계만을 고집하는 나였는데, 추운 겨울날은 이소리 없이는 잠들지 못하는 상태까지 이르렀다.

물 떨어지는 소리는 우리 수도가 무사하다는 증거였다. 이 소리를 자장가 삼아 내 긴 겨울밤은 빠르게도 느리게도 지났다.


 노력에도 불구하고 겨울에 한두 번은 수도관이 터지곤 했다. 그날도 그랬다. 눈뜨자마자 틀은 싱크대 수도가 쿨럭거린다. 가래 끓는 소리와 함께 꿀렁이던 수도는 물방울을 웩 한 번에 토해내더니 잠잠하다. 불안한 마음에 화장실 물을 틀어본다. 할아버지 기침소리를 몇 번 내던 화장실 수도도 맥없이 졸졸 흐르다 끝나버린다. 보통 수도가 얼어도 낮이면 자연스레 녹기 때문에 기다려 보기로 한다.


낮 2시. 수도는 여전하다. 경비실에 문의하니 전화번호 몇 개를 불러주신다. 동파로 인해 극성수기를 보내는 기술자 선생님은 전화상으로 상태를 듣더니 20만 원을 부르신다. 그마저도 오늘은 안된단다.

복도에 나와 속상해하고 있는데 끝집 할머니께서 한마디를 던지신다. "뜨거운 물 부어봐~ 드라이기로 열도 쐬주고" 연륜 있는 조언에 희망의 불씨가 인다. 나는 집으로 들어가 포트 가득 물을 끓인다. 수도함을 열고 뜨거운 물로 수도를 녹여본다. 2리터가 넘는 물로 언 수도를 달랜 다음 집에 있는 첫째에게 소리친다  "물 틀어봐!"


"안 나와요~" 허탈한 답변이다. 눈앞에 20만 원이 스쳐간다.

이번에는 드라이기다. 뜨거운 바람으로 녹이는데 집안에서는 난리가 난 모양이다.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심상치 않다. 아직 어린 둘째가 넘어져 다치기라도 할까 봐 걱정이다. 첫째에게 걸쇠를 걸으라 당부한 다음 문을 살짝 연다. 방범용 체인이 허락한 틈은 좁기만 하다. 아이들은 그 좁은 공간에 눈을 내밀고 나를 지켜본다. 조금 큰 첫째의 눈은 위에서, 걸음마 시작한 둘째의 눈은 아래에서 반짝인다. 얼마나 얼굴을 가까이 댔는지 한쪽 볼이 눌려 빵빵한 아이들을 보며 전의를 불태워 본다.

두 개의 호빵 같은 볼들을 응원삼아 드라이는 풀 가동되고 뜨거운 물은 보조를 맞춘다. 얼마가 지났을까.

집안으로 다다닥 뛰어들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엄마!!! 이제 물 나와요!!!!"

수도에서 물 토해내는 소리가 난다. 성공이다. 꽁꽁 언 손발과 달리 입에서는 웃음이 터져 나온다.

'나 오늘 20 벌었다!!!!'  

펄펄 내리는 눈을 배경 삼아 드라이기와 포트를 챙겨 집으로 복귀한다. 내 뒤에 후광 보이니? 엄마 오늘 좀 멋있다.




이제 동파걱정 없는 아파트로 이사와 편안한 겨울을 보내고 있다. 한 층에 두 세대만 사는 이곳에서 수도관 동파는 남의 일이다. 똑똑똑 소리 없이 잠들게 된 사이, 첫째는 11살. 10대가 되었고 기어다디 던 나의 둘째는 9살이 되었다.


공짜로 수도 고쳤다고 좋아하던 철없던 나의 그때.

깜빡깜빡. 사람들 발길에 켜지던 복도 센서로 작은방은 밤 새 반짝였다. 잠을 방해하는 불빛에 평소라면 불만을 토했겠지만 그때는 달랐다. 배불리 먹고 곤히 자던 아기얼굴로 주황색불이 비춰 들어오면 나는 행운을 잡은 것 마냥 고개를 들어 아이얼굴을 바라보았다. 몇 초 뒤 복도 불은 꺼지고 얼굴도 보이지 않을 어둠이 오면 나는 아쉬운 마음에 새근새근 젖내 나는 아이 숨소리에 집중했다. 아이 숨은 달큼했다. 달디달았던 나의 아가.


밤새 똑똑 떨어지던 물방울 소리. 연통으로 폴폴 나가던 수증기. 작은방으로 가려면 현관 센서가 켜지던 작은집.

그래도 그 시절이 그리운 건 배밀이를 하고 이유식을 먹던 나의 아가들이 거기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게 희생의 기쁨을 알려준. 날 웃게 만들었던 나의 아기들이 있던 곳.

지나고 보니 동파의 추억도 내겐 기꺼이 기쁜 추억이다.








* 화기 사용 시 화재의 위험이 있고, 50도 이상 뜨거운 물을 사용할 경우는 계량기 파손 위험이 있으니 주의해 주세요 - 서울특별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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