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남다른 어린 시절
좁은 군인아파트 거실에 내가 있다. 희미하게 탕! 탕! 총소리가 들린다. 사격 소리가 익숙한 12살. 나는 군인의 딸이다. 단지 입구에 경비실 대신 사병 근무소가 있는 군인 사택. 이곳이 나의 집이다.
아빠는 직업군인 이셨다. 진급이나 직위변경 때마다 부대를 이동해야 했다. 아빠를 따라 우리 가족은 이사를 많이도 다녔다. 남 다른 유년시절 덕분에 내 성장앨범은 페이지마다 지역이 다르다. 첫 페이지는 부모님 고향이셨던 전라도에서 시작한다. 몇 번의 이사 후 동생이 태어난 경기도 연천군에서 유년시절을 보냈고, 전라도 광주에서 초등학교를 입학했다. 경상남도 진해로 전학했고, 강원도 철원군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이사는 특별하지 않았다. 친구들 집에는 풀지 않은 이삿짐이 쌓여 있었다. 우리 집이라고 다를 것 없었다. 여름에 이사와 겨울 옷 꺼내기 전 이사 가는 일도 있었다.
“나 다음 달에 이사가”
친구의 말에 놀라는 아이들은 드물었다.
“왜?” 라고 묻는 대신 “어디로?” 가 다음 대화 수순이었다.
중학생 때 처음으로 위수지역을 떠나 도시로 이사했다. 학기 초 부모님 직업 조사가 있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군인은 나오지 않았다. 선생님은 거수하지 않은 아이들을 찾아내셨다. 기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빠 군인이신데, 제가 못 들었나 봐요.”
내 말에 선생님은 답답해하며 말씀하셨다.
“공무원에 손 들었어야지!”
충격이었다. 그럼 50명이나 되는 우리 반에 군인가족이 나뿐인 거야?
쉬는 시간에 옆 친구와 이야기를 나눴다.
“너는 어디서 이사 왔어?”
“이사 오다니? 나 이사 한 번도 안 해 봤는데?”
지금 사는 집에서 태어났다는 친구의 말에 나는 너무 놀랐다. 친구는 전학 오자마자 이사 유무를 묻는 나를 의아해했다. 몇 년마다 이사 다니는 게 평범했던 내 사고에 금이 갔다. 평범 한 건 한동네에서 나고 자란 친구들이었다. 반에 90%가 군자녀였던 초등학교가 특수했다는 걸. 나는 13살이 되어 알았다.
친구들에게 집은 동네였다. 집이 바뀌어도 동네가 바뀌는 일은 드물었다. 우리 가족은 조금 달랐다. 우리에게 집이란 장소가 아니었다. 집은 서로가 있는 곳이다. 낯선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때마다 부모님은 나와 동생에게. 나와 동생은 부모님께 집이 되어 주었다. 이렇듯 끈끈한 가족애 덕분에 잦은 이사가 혼란스럽지는 않았다. 어디를 가든 두려움 없이 빠르게 적응할 힘이 길러졌을 뿐이다.
정착생활을 꿈꾸던 난 나만큼이나 이사 경력이 화려한 남자와 만나 결혼했다. 우리는 초본 어디쯤에서 부부가 되어 벌써 3번의 이사를 함께 했다. 우리 부부는 서울에서만 이사 다니기 시시했는지 몇 년 전 서울에서 울산으로 1박 2일짜리 이사도 해냈다.
우리는 내년 서울 발령을 기다리고 있다. 바로 1년 뒤도 모르는 불확실한 삶이지만 불안하지 않다. 어릴 적부터 적응엔 도가 텄다. 시작은 허둥지둥하겠지만 나는 안다. 언제나 그랬듯 곧 일상을 찾을 것이다.
앞으로 쓸 이야기는 차곡차곡 쌓였던 내 기억 속 '집'이다. 집을 등에이고 다니는 달팽이처럼. 멈추는 곳이 곧 집이 되었던 나의 성장기. 떠날 걸 예상하기에 더 애틋했던 내 안식처. 그 안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 언젠가 한 번쯤 꺼내보고 싶었던 기억들을 글로 옮겨 보고자 한다.
잦은 이사에 혼란스러울 아이들에게 내 경험을 빗대어 응원을 보내본다. 그리고 앞으로의 집에게도 미리 인사를 보낸다. "반가워. 이번에도 잘 부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