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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티카카 Mar 11. 2022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스물다섯 살. 호된 신고식 같던 직장생활로 나는 흰머리를 얻었다. 시작은 오른쪽 이마 위였다. 3가닥 정도로 시작한 새치는 출근 때마다 도장 찍듯 한 개씩 늘었고, 퇴직할 때가 되자 아기 주먹만큼 범위가 넓어졌다. 속상했지만 가르마를 바꿔 숨겨버리거나 염색으로 감출 수 있었기에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서른 살. 첫아이를 낳고 백일이 지나자 머리가 우수수 빠지기 시작했다. 강아지 털갈이하듯 빗질마다 머리카락이 가득이었다. 빠질 만큼 빠지고 나니 머리카락은 새싹 나듯 자랐다. 그중 눈에 띄던 건 흰머리였다. 검은 머리 사이에서 반짝반짝 뻣뻣하게 존재감을 뽐냈다. 자세히 보니 구역도 늘었다. 아기 주먹 같았던 흰머리 구역은 손바닥만큼 늘어나 있었다. 수유 중이라 염색도 무리였다. 긴 머리, 짧은 머리, 흰머리, 검은 머리 모두 섞인 내 헤어스타일은 신생아 키우던 내 마음만큼이나 정신없었다.


서른다섯 살. 이제 더 이상 흰머리를 감추기 힘들어졌다. 염색을 시작했다. 흰머리는 일반 염색약이 아닌 새치 전용 염색약이 필요했다. '새치 전용' 이름부터 맘에 들지 않았다. 어릴 적 흰머리 한 개에 10원씩 쳐주었던 아빠 생각이 났다. 그때 아빠 나이와 내 나이가 얼추 맞아떨어진다. 스트레스성 새치도 원통한데 유전자까지 힘을 보탠다. 흰 곰팡이 같은 새치는 가속도가 붙었는지 머리 이곳저곳에 빠르게 포자를 퍼트리고 있었다.


서른아홉. 염색하고 한 달은 깔끔하다. 두 달이 되면 유난히 빳빳한 흰머리들이 고개를 든다. 남편은 엘리베이터에서 눈에 띄는 흰머리를 촵! 뽑아 내 손바닥에 올려놓는다. 한 번에 잘 뽑히면 희열을 느끼는 정도니 취미라 불러도 무방할 듯하다. 세 달째 되면 아이들도 한 마디씩 보탠다. "엄마! 할머니 머리 나와요!" 급하게 머리칼을 눌러보지만 두더지 잡기 게임하듯 흰머리가 뿅 솟아오른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해로하세요' 결혼식 주례 단골 멘트다. 주례 말씀 대로라면 우리 부부는 결혼 10년 만에 해로한 셈이다. 다 파뿌리 같아진 내 머리카락 덕분이다. 



이사온지 한 달째. 아직 새로운 미용실을 찾지 못했다는 핑계로 염색한 지 3달이 넘어간다. 남편은 아침부터 염색하라고 떠밀지만 귀찮아 모른 척을 한다. 거울 앞에서 가르마를 넘겨 흰머리를 감춰보려 애써본다. 무리다. 가르마를 이리저리 타보지만 흰머리는 어디에나 있다. 아침부터 슬퍼진다. 늘어날 일은 있어도 줄어들 일은 없는 내 흰머리. 백발이 되려면 20년은 기다려야 할터인데 그때까지 일 년에 4번씩 염색을 하려니 눈앞이 깜깜해진다. 아 슬프다. 나는 머리카락부터 늙기 시작하나 보다. 이렇게나 일찍 흰머리를 내어주었으니 그 대가로 주름이라도 늦게 오길 바라본다. 안 그러면 너무 억울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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