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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티카카 Mar 19. 2023

온 마음을 다해 네가 괜찮기를 바라본다.

중학교와 버스정류장 사이에 있던 친구네 집은 우리들의 아지트였다. 우리는 학교가 끝나면 만화책을 잔뜩 빌려 친구네로 향했다. 옹기종기 모여 앉은 다섯은 이불 하나를 나눠 덮고 만화책을 읽었다. 대부분 로맨스 판타지 만화 였다. 금서를 읽는 듯 여중생들의 얼굴은 종종 붉어졌고 다음 권을 기다리는 아이는 발가락을 꼼지락대며 초조히 차례를 기다렸다.


간혹 순정만화 사이에 다른 장르가 끼어 오기도 했다. 공포와 무협지 만화 사이 표지가 유난히 어두웠던 그 책은 지독한 복수에 대한 만화였다.

주인공은 어떤 이에게 원한을 가지고 복수의 방법에 대해 고민한다. 직접적인 복수라 함은 목숨을 끊어버리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는 나와 생각이 달랐다. 그는 복수의 대상만 빼고 주변인들을 모두 죽이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를 아는 사람은 모두 죽었다. 기억해 줄 이 하나 없는 세상에서 그 사람은 산채로 모두에게 잊혔다. '이것이 진정한 죽음이구나' 나는 뒷골이 섬뜩했다.




나에게는 소중한 친구가 한 명 있다. 13살에 처음 만나 26년째 내 마음의 기둥이 되어주는 친구다.

나의 아빠는 군인이었고 친구 아빠는 경찰이었다. 우리의 엄마들은 방지턱을 감속 없이 붕 나는 급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목소리가 호탕하고 생활력 강한 엄마는 각자 아들 딸을 낳았다. 원리원칙주의자 아빠와 사업가 기질의 엄마, 철없는 남동생까지 우리는 평행이론처럼 같았다.


중고등 동창인 친구와 나는 수많은 추억을 함께 했다. 중간고사도 기말고사도 방학도 함께였다. 여드름 나는 사춘기를 같이 넘기고 스무 살을 함께 맞았다. 설레는 첫사랑도 슬펐던 이별도 옆에서 지켜봤고 엄마도 모르는 흑역사를 공유했다.


우린 대책 없는 것도 똑같았다. 어느 저녁 패스트푸드점 감자튀김을 앞에 두고 책 한 권을 같이 읽었다. 거창할 것 같았던 세계일주는 그렇게 간단히 결정이 되었다. 지도도 준비하지 못한 우리는 출발 하루 전 겨우 비자를 받아 퇴사한 지 이틀째날 비행기에 올랐다. 예약한 숙소에서 묵은 건 여행 첫날이 처음이었다. 그것도 예약이 아닌 숙소 전화번호만 적어 갔을 뿐이었다. 결국 방이 꽉 차서 우리는 주인아주머니 집 거실에서 첫 밤을 보냈다.


무계획의 끝판왕. 도시가 마음에 들면 보름도 넘게 묵었고, 맘에 안 들면 관광지가 수백 개가 있어도 하루 만에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로 넘어갔다.

지친 날은 빵 하나 사서 공원 벤치에 앉아 하루를 모두 보내기도 했다. 포세이돈 신전을 갔을 때도 우리는 관광 대신 작은 올리브 나무 아래에 앉기를 택했다.

누구 하나 불만 있는 사람은 없었다. 말을 안 해도, 말을 해도 지루하지 않은 친구와 내 시간은 너무나 평화로웠다.


 친구는 지도의 달인이었다. 처음 본 길을 지도만 봐도 척척 찾아갔다. 나는 한번 봤던 길은 잊지 않았다. 친구는 작은 지도와 간판을 이용해 숙소를 찾아냈고, 나는 관광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을 귀신같이 찾아냈다. 환상의 짝꿍. 영혼의 단짝이었다.


여행을 하며 우리는 한 번의 다툼도 없었다. 나는 확신했다. 세상 누구를 붙여놔도 긴 여행길을 함께하진 못했을 것이다. 모두 이 친구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극한의 상황이 많았지만 사이에 금이 가지 않았다. 눈물이 날 만큼 힘들었던 사건은 두고두고 놀림거리가 될 우리의 에피소드일 뿐이었다.





가끔 그 무서웠던 표지의 책이 생각난다. 그리고 그 생각의 끝. 내가 받을 제일 큰 벌에 대한 상상이 꼬리말처럼 따라온다. 생각은 오래가지 않는다.

내가 받을 최고의 시련은 친구의 부재다.

친구의 기억이 내 과거의 대부분이다. 친구가 없다면 내 10대와 20대를 기억해 줄 사람이 누가 있을까? 친구는 나의 모든 실수와 절망, 기쁨까지 함께 했던 사람이다. 자존심과 허세를 모두 내려놓고도 초라해지지 않을 수 있는 상대. 내게 온 귀인. 그녀는 내 평생의 축복이다.


친구는 요즘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걱정되는 마음에 전화를 걸어 쓸데없는 이야기를 나눈다. 우리만의 위로법. 어두운 터널을 걷는 친구에게 조용히 응원을 건네본다. 도움 될만한 조언이나 멋들어진 명언을 읊을 일이 없을 것이다. 천 마디 말보다 그저 친구 옆에서 묵묵히 걸어주기를 택한다.


800km를 나란히 걸었던 그 여행 때처럼. 앞서거나 뒤처지며 옆에 있어본다. 발자국 소리와 숨소리만으로 존재를 알리며. 그저 온마음을 다해 친구가 괜찮기를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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