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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티카카 Sep 02. 2022

동생의 계절 - 여름

강원도 철원


동생의 여름

© brianwangenheim, 출처 Unsplash

방학이다. 고삐가 풀린 동생의 아침은 빨랐다. 아빠 출근과 동시에 동생은 집을 나섰다. 까까머리 동생은 작은 다리를 건너 슈퍼를 지나 넓은 논으로 달렸다. 1시간쯤 가다 보면 띄엄띄엄 농가가 나왔다. 그중 친구 집이 있었다. 매고 갔던 곤충 채집통과 잠자리채만 있으면 하루는 금방 지나갔다.


아침에 나간 동생은 석양을 등지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잠자리 통은 곤충들로 빼곡했다. 귀뚜라미, 여치, 나비, 잠자리 그리고 가끔 사마귀도 있었다. 동생은 채집통에서 곤충들을 골라 내게 선심 쓰듯 주었다. 나는 그중 예쁜 잠자리로 표본을 만들었다. 스티로폼 판에 약품을 바른 곤충을 놓고 핀으로 고정하면 되는 곤충표본은 여름방학 단골 숙제였다. 숙제를 위해 뒷거래도 성행했다. 그중 딱정벌레와 같은 갑옷 곤충들은 인기였다. 산으로 논으로 원정까지 다녔던 동생의 잠자리 통은 늘 인기 만점이었다.  


해가 지는 여름 오후.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사마귀 싸움을 구경하곤 했다. 피부에 닿으면 사마귀가 난다는 미신을 믿던 나는 늘 멀찍이 떨어져 있었지만 동생은 늘 구경의 앞줄을 차지했다.

사마귀가 손을 칼처럼 들고 휘두를 때면 아이들은 얕게 비명을 질렀다. 권투 같기도 펜싱 같기도 한 싸움은 손에 땀을 쥐게 했다. 싸움의 내용은 매번 달랐지만 결론은 비슷했다. 눈을 반짝이던 아이들은 싸움이 끝나면 자리를 떠났고, 이긴 사마귀도 짧은 영광을 뒤로 한채 풀숲 어딘가로 사라졌다.


결말이 정해진 싸움. 어떤 사마귀가 이기느냐는 내 관심 밖이었다. 싸움이 무르익어 사마귀가 다른 사마귀의 목을 잡으면 나는 자리를 털고 무리를 벗어났다. 내가 감당하기에 싸움의 끝은 너무 잔인했다.



© Hans, 출처 Pixabay

1996년 여름. 철원에 집중호우가 쏟아졌다. 모두가 잠든 밤 요란한 비상경보가 울렸다. 엄마는 겉옷을 걸치고 급히 집 밖으로 나갔다. 아파트 입구에서 찰랑이던 물은 금세 1층 집안까지 들이닥쳤다. 저층 주민이 탈출하자 열어놓은 현관문으로 세간살이들이 둥둥 떠오르기 시작했다.


부대에서도 비상 사이렌이 울렸다. 산사태로 무너진 흙더미는 무기고를 밀고 들어왔다. 비상사태에 아빠는 부대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군인아파트에 남은 여자 어른들은 달이 휘영청 뜬 밤 트럭에서 모래주머니를 내려 작은 다리와 이어진 길을 막았다. 아빠들은 부대를 지켰고 엄마들은 집을 지켰다. 덕분에 물줄기는 아파트로 향하지 않았고 우리들은 무사할 수 있었다.


천둥이 치고 빗소리가 귀를 따갑게 했던 밤이 지났다. 하루아침에 군인아파트와 관사는 고립되었다. 베란다 밖으로 본 바깥은 온통 흙탕물이었다. 저층 아파트와 관사는 진흙으로 엉망이 되었다. 세숫대야며 국자며 집안을 떠다니던 물건들은 제자리를 잊고 물이 빠진 장소에 뚝 떨어졌다. 화장실에 있어야 할 바가지가 안방에서 발견되었을 때 어른들은 큰 한숨을 쉬었다. 어수선한 집안만큼 우리들 마음도 어지러웠다.


지도 속 38선은 개미 한 마리 넘어갈 수 없을 듯 진했지만, 자연재해는 사람들이 그어놓은 선 따위를 가볍게 무시했다. 어떤 이의 천장이었을 지붕과 세간살이들로 흙탕물 강은 복작였다. 불어진 강에는 소와 돼지도 떠내려 왔다. 어른들은 북에서부터 떠내려온 돼지를 보고 간첩돼지니 신고하자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산 것을 잡았으니 포상이 두둑하겠다는 어른들 말에 웃지 못하는 건 나뿐이었다.  


다음날 오후 요란한 소리를 내며 헬기가 떴다. 육로가 끊겨 헬기로 긴급 구호물품과 식량을 받았다. 전기도 물도 끊겼다. 냉장고는 작동을 멈추고 밤에는 촛불로 생활을 이어갔다.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이었다. 큰 홍수로 인명 피해도 컸다. 부대 내 생활관이 산사태에 무너졌고, 저지대였던 문방구도 강물에 휩쓸렸다. 작은 문방구에 딸린 방에서 지내시던 주인 할머니도 강물과 함께 사라졌다. 가게문 여는 소리에 방문을 열고 빼꼼 내다보시던 할머니가 생각났다. 아이들은 한동안 슬픔에 빠졌다.


마을과 어른들이 난리가 난 사이 동생은 집에서 자주 사라졌다. 아침밥 먹자는 소리에 대답이 없자 엄마는 방문을 활짝 열었다. 자고 있어야 할 동생은 방에 없었다. 이런 상황이 익숙한 듯 엄마는 한숨을 작게 쉬고 파리채를 챙겨 바깥으로 뛰어 나갔다. 동생은 주로 집 앞 웅덩이 앞에서 발견되었다. 팬티 차림으로 나뭇가지에 실을 엮어 물고기 낚시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엄마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함소리에 물고기 도망갔다며 성을 냈다고도 했다.

동생은 내가 아침밥을 거의 먹을 때쯤 엄마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팔뚝에 새겨진 파리채 자국을 보고 나는 지레 겁을 먹었다. 동생은 아무것도 아니란 듯 눈썹을 올리며 내게 낚싯대라 불리는 이상한 나뭇가지를 건넸다. 파리채 무늬가 새겨진 동생의 팔뚝과 실 달린 나뭇가지. 나는 둘 중 어느 것 때문에 깔깔 댔을까?


아빠는 홍수 삼일째 되던 날 집에 왔다. 구호물품 중 어렵게 구한 초코파이와 함께였다. 환호를 기대했는데 아들 반응은 시큰둥했다. “나는 오예스가 더 좋은데. 바꿔주세요. ” 동생의 당당한 요구에 아빠는 힘이 풀렸다. 그리고 그해 여름. 더 이상 과자는 없었다.



복구는 생각보다 더뎠다. 비무장지대에서 떠내려온 철책선과 무기고에서 탈출한 지뢰들은 강속에 가라앉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기들은 마치 악어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을 따라 안전선들이 쳐졌다.


 우리는 개학과 동시에 학교 운동장에 모여 간이 테이블에 놓인 지뢰 모형에 대해 설명을 들어야 했다. 조금씩 다르게 생긴 지뢰들은 아이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아이들 눈이 빛나자 지휘관 아저씨는 당황하여 다리가 잘린다던가 몸이 날아간다던가 하는 공포 가득한 말들을 쏟아내셨다. 그러나 순진한 아이들이 그 말을 곧이 받아들일리는 없었다. 겁먹어야 할 아이들 대신 아저씨 얼굴에만 겁이 잔뜩 묻었다.


마음 놓고 놀 땅이 없어지자 우리는 높은 언덕에 앉아 군인 아저씨들을 관찰했다. 금속탐지기로 강변을 훑는 아저씨들 중 누가 먼저 지뢰를 찾을 것인가 내기도 했다. 판박이 스티커 껌이 걸린 내기는 얼마간 우리의 지루함을 앗아가 주었다..


잔인했던 96년도의 여름. 강을 잃은 아이들이 철들기도 전. 여름은 올 때처럼 간다는 말도 없이 슬그머니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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