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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드랑 Feb 26. 2022

[남미에세이] #1 세상이 꼬여버렸다면

페루_리마_Lima (1), <왜 지금 남미>

Travel Route | 페루 리마 | - 칠레 - 볼리비아 - 아르헨티나 - 브라질 |

페루 여행 | 리마 - 와라즈 - 쿠스코



⌜세상이 꼬여버렸다면⌟


여행 첫날부터 나를 둘러싼 세상이 완전히 배배 꼬여버리는 중이었다.


공항에 도착해 배낭이 나오길 기다리는데 컨베이어 벨트가 완전히 멈출 때까지 기다려도 동생의 배낭이 나오지 않았다. 허겁지겁 알아보니 마이애미 공항 경유 때 옮겨두었던 짐이 항공사 측 실수도 도착하지 않았단다. 카운터 직원과 한참을 실랑하여 오늘 저녁이나 내일 아침 호텔로 짐을 배달해주겠다는 확답을 얻어냈다. 


겨우 한 숨을 돌리고 내 배낭을 살펴보는데, 설상가상으로 메인 지퍼 한쪽이 완전히 망가져서 돌아왔다. 여행 첫날부터 세상이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가. 인간은 적응하는 동물이라는 말이 딱 맞다. 그렇게 남미 여행 내내 나는 지퍼 한쪽을 배낭 뒤쪽 끈으로 싸매어 묶고 다니는 법을 터득해버렸다. 그날부로 배낭에 걸어둔 자물쇠 역시 무용지물이 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이 가방의 운명은 하늘에 맡기기로 했다. 


예상했지만 예상보다 쉽지 않은 여행길, 

이제 겨우 시작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첫 여행지는 페루의 수도, 리마였다. 19세기 초 남아메리카가 에스파냐로부터 독립할 때까지 거점 도시의 역할을 했던 곳이다. 크게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로 나뉘는데 현대식 빌딩들이 줄기차게 늘어선 신시가지보다는 스페인풍 건축 양식이 그대로 남아있는 구시가지를 먼저 찾았다.


구시가지 풍경



스페인어도 할 줄 모르면서


무작정 핸드폰 데이터 없이 여행을 시작했더니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곳 사람들은 영어를 잘 할 줄 모른다.) 아, 정말 이렇게 여행을 시작해보니 말 그대로 망망대해 한가운데 떨어졌다는 말이 무엇인지 뼈져리게 경험했던 것 같다. 여행을 하는 내내 어디쯤에 서 있으며 얼마만큼을 걸어왔는지 파악하기가 너무나도 어려워서, 짐을 놔둘 숙소를 찾는 일부터, 관광지, 식당, 화장실, 편의점까지. 아주 기본적으로 '길 찾는 일'이 정말 힘들었다.



그래서 터특하게 된 생존법은 하나. 고민할 시간에 GO! 무작정 몸부터 움직여봐야 한다는 것!!


그래, 무작정 몸부터 움직여야 한다.


낯선 나라에서 종이지도 하나 들고 길을 찾으려면, 정말이지 고민할 시간에 몸부터 움직여야 한다. 골목골목을 내 발로 들어가 봐야 하고, 이 사람 저 사람 가리지 않고 붙들어 길을 물어야 하고, 식당이건 편의점이건 목적지를 찾기 위해 부단히도 뛰어다녀야만 한다.


그러니까 여행의 처음부터 끝까지 한 순간도 빠짐없이 미친듯이 '노력'해야만 했다는 뜻이다. 그렇게 치열하게 달려야만 길이 보인다. 그렇게 물불 가릴 것 없이 발을 놀리다보면, 재밌게도 목적지는 반드시 보인다.


나는 우리들이 사는 인생도 '데이터 없이 길 찾기'와 참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망망대해와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는 내가 두 발 밟고 서 있는 이 지점이 내 인생을 통틀어 과연 올바른 선택이었는지, 나는 내 커리어의 어느 지점에 서 있는 건지, 도대체 무엇이 정답이고 실패며 성공인지 미리 알아낼 수 있는 방도가 없다. 그래서 때로는 고생스러운 길목을 택해 시간과 노력을 쏟아버리기도 하고, 내 스스로의 한계에 부딪혀 절망감에 빠져버리도 하고, 누군가에게 손가락질 받거나, 바래본적 없는 동정 어린 시선들에 방황하기도 한다. 


그래서 세상이 나를 두고 완전히 꼬여버린 것 같은 비참함을 느낄 때가 있다.



그런데 가만 보면 어린이든, 어른이든, 노인이든. 다들 각자의 시간에서 막연하게 헤엄치듯 그 인생길을 걸어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나이를 막론하고 삶의 막막함은 모두에게 공평해서, 나만 특출나게 힘이 들고 어렵다고 불평할 필요도 없다. 사람의 인생이라는 것이 결국 가파른 여정을 헤매다가 이따금씩 발견하는 쉼터에서 얻는 성취감과 행복감으로 숨을 고르고, 이를 발판 삼아 또 한 번 더 새로운 목적지를 향하여 나아갈 힘을 얻는 과정, 그 과정의 반복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나만 빼고 세상이 다 꼬여버린 것 같은 절망감이 몰려오더라도, 남미의 골목골목을 휘져으며 뛰어다니던 Korean 여행자의 생존법처럼 오늘 하루를 아주 적극적으로 살아보는 치열함. 그것만이 온전한 삶을 완성해가는 유일한 해법이라고 믿는다.


남미 여행 이후, 미국 교환학생 시기를 보낸 다음, 미친 듯이 달려왔던 1년 반의 수험 기간을 정리했다. 또 다시 진로 탐색의 시기를 고전하고 있는 나에게는 참 힘이 되는 인사이트다. 갖은 고생을 다 하더라도 부단히 발품을 놀려대기를 포기하지 않으면 반드시 목적지를 찾아낸다. 종이 지도 하나로 지하철 역을 찾아내고, 버스 정류장을 찾아내고, 음식점을 찾고, 친구들을 찾아낸다. 다 할 수 있다. 그러다 보면, 매 번 신기할 정도로 고비를 넘겨내는 나 자신에게 감격하게 된다. 그리고 그 감격은 다음 고비를 맞이하는 나에 대한 단단한 자존감으로 되돌아온다.


그러니 당신과 나, 우리가 어떤 하루를 보냈든 후회없는 치열함으로 살아냈다면 그냥 사라지는 시간은 없는 거다. 가타부타해도, 매일 매일 쏟아내는 노력으로서 빚어지는 것이 나는 결국 삶이라고 믿는다.





2018/6/28/목요일의 기록


리마는 흐린 날이 맑은 날보다 많다고 했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여행할 때 칙칙하고 어두운 하늘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그렇지만 리마 특유의 고요한 분위기가 자꾸 기분을 들뜨게 만드는 건 왜인지. 


길거리 행상

새로운 출발을 앞두고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를 때 느껴지는 불안감을 당신은 아는가. 일종의 설레임과 불안감의 경계선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겠다. 괴롭지만, 동시에 새로운 성장 스토리를 만들어버릴 수도 있는 아주 매력적인 순간이다. 아 정말, 마약같은 중독성이 있단 말이다.




리마에서의 첫 끼는 길거리 피자 스토어! 고생 끝에 먹는 식사가 얼마나 맛있는지 알 사람은 다 안다. 그때처럼 맛있는 피자는 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도저히 먹어볼 수가 없다.


리마 구시가지 길거리 피자 스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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