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2월 아현동 재개발구역에서 쓰다
2000년 11월.
지방 근무 중 본사로 발령을 받아 서울 아현동 언덕에 방을 얻어 자취를 시작했다.
아내와 아이들 모두 지방에 남겨둔 채 홀로 시작한 서울 생활.
밤늦게까지 일하고 늦은 잠을 청하고 다시 아침 일찍 회사에 출근하는 반복되는 생활에서 당구장, 호프집, 냉면집, 노래방, 아현시장, 보신탕집, 아현초등학교 등 활력이 되었던 추억의 장소가 많이 생겼다.
호프집 아저씨의 기타 소리며 당구장에서 먹던 자장면과 세탁소의 화학약품 냄새, 아현시장의 북적거리는 모습.
하교시간 쏟아져 나오는 아현초등학교 아이들.
퇴근하여 아현동 언덕을 오르며 달을 보기도 하고, 숨이 차서 쉬어가기도 하며 그렇게 온가족이 서울로 이사 오기까지 1년의 세월을 아현동과 같이 호흡하며 내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2007년 6월 아현동 재개발 승인이 이뤄지고 그해 12월부터 시작되어 대부분 이사가 완료된 2008년 12월 1일 아현동 재개발 구역을 찾았다.
자취하던 집은 텅 비어서 쓸쓸했고 골목을 따라 늘어선 불백 식당, 호프집, 세탁소, 당구장도 '공가'라는 붉은 글씨와 함께 쓸쓸히 남겨져 있었다.
언덕 꼭대기에 이르기까지 다닥다닥 붙은 집에서 들리던 사람 사는 소리, 살고 싶어 우는 소리는 사라지고 겨울 찬바람만 집안을 맴돌고 있었다.
쓰레기며 잡동사니며 남은 가재도구가 떠난 주인을 대신하여 마당 한편에 널브러져 있고, 주인을 잃은 슬픔에 깨지고 찢기고 부러진 채 아파하고 있었다.
조용히 떠나고 없는 툇마루에 앉아서 아현동이 말하는 소리를 듣는다.
세월이 지나서 기억에서 지워지기 전에 눈에 담고 가슴에 느낀 아현동을 그린다.
그리고 그곳에서 들었던 무수한 이야기를 말한다.
1. 창문을 바라보는 늙고 초라한 문의 이야기를 듣다
이제 곧 겨울이다
손주 녀석이 손가락으로 뻥뻥 뚫어놓은 격자무늬로 짠 출입문에
창호지를 바르는 어머니의 소리를 듣는다
창문을 바라보는 늙고 초라한 문의 이야기를 듣는다
2. 창문을 열고 멀리 높다란 건물들에게 던지는 말을 듣다
창문을 열고 멀리 높다란 건물들에게 던지는 말을 듣는다
누군가 처마를 맴돌던 참새에게 말하던
먹먹한 가슴 깊은 소리를 듣는다
비가 새는 처마에 앉아 마음을 툭하고 던지며 뱉는
삶의 노래를 듣는다
"나도 언젠가 비탈진 산동네를 벗어나
멀리 보이는 높다란 건물로
훨훨 날고 싶다"고
3. 천정에서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다
천정이 깨져서 비가 샌다.
모두 교체하려면 기백만원이나 들 텐데....
지갑을 열고 통장을 열고 이내 단념해버린다
천정에서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는다
꺼져가는 우리들의 한숨 소리를 듣는다
4. 집에 살았던 사람들의 소리를 듣다
나이 지긋한 노인은 말한다
아현동 시장이 있어 좋고 담장이 낮아서 좋고
음식을 나눌 수 있는 넉넉한 인심이 있어서 좋고
대문을 열어도 도둑 걱정 없어서 좋았단다
막상 이사 가려니 답답하단다
마음 상한 그리움을 소리를 듣는다
집에 살았던 사람들의 소리를 듣는다
5. 빨래집게는 햇빛과 바람이 주는 위로의 말을 듣다.
이사 가고 없는 텅 빈 마당 한편에서 오래전 기억을 더듬는다
언젠가 새로 구입한 옷을 빨래 줄에 콕 집어 널었다고
햇빛도 쬐이고 바람도 맞으며 뽀송뽀송 말렸다고
그 옷을 입히며 소박한 미소 지었노라고
옷을 입고 좋아했을 아이들의 화사한 웃음
이제 하나 둘 자식이 떠나고
아이들의 웃음소리 사라진 마당
오랜 기억들을 빨랫줄에 널고
햇빛과 바람이 들려주는 위로의 말을 듣는다
6. 불투명한 미래를 묻는 이야기를 듣다.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을 제일 잘 알고 있는 것은
나 자신이다
먼 훗날 내가 어떻게 살고 있을지 가장 잘 아는 것도
나 자신이다
내가 살아온 이전의 삶
내가 살고 있는 지금의 삶
내가 살고 싶은 미래의 삶
그 모든 삶의 주인공은 '나'다
가끔 살아야 할 삶이 궁금해서
지금보다 더 잘 살고 싶은 욕심에
몇몇은 점집을 찾지만
인생은 자기가 만들어 가는 것이기에
자기가 감독이고 주인공이기에
오늘, 지금 순간을 진실하게 살자
아현동 고개에서 불투명한 미래를 묻는 이야기를 듣는다.
7. 가스로 밥 짓는 어머니의 그리운 노래를 듣다.
바람이 소스라치게 불어 마음조차 시린 겨울에도
벚꽃이 마당 안에 하얗게 내려앉아 화사한 봄날에도
햇볕이 쏟아지면 하늘하늘 옷들이 춤추는 여름에도
옥수수수염이 말라 토실토실 익어가는 가을에도
하루를 여는 새벽에도
하루를 닫는 저녁에도
어머니는 밥을 짓는다
자식을 위해 한 세월 고생했어도
무엇이 그리운지
무슨 미련이 남는지
밥솥 한편에 밥공기 하나 남겨두고
문틈 사이로 자식이 부르는 소리를 기다린다
하나 둘 내 품을 떠나고
삶이 기다림의 연속이기에
그래도 밥 지을 때가 좋았노라
반찬 없지만 함께 먹을 때가 좋았노라
밥솥 뚜껑을 열고 흰쌀 한 바가지 넣고
그리움을 물 삼아 밥을 짓는다
아현동 허름한 뒷골목 사이로
어머니의 밥 짓는 소리를 듣는다
자식을 향한 그리움의 노래를 듣는다
문틈 사이로 어머니의 밥 짓는 소리를 듣다
자식을 위해 한세월 고생하고서도
늘 밥솥 한편에 자식을 위한 밥 한 공기 남겨두는
우리들의 어머니의 가슴 벅찬 사랑의 이야기를 듣는다
가스로 밥 짓는 어머니의 행복한 마음을 듣는다
8. 창문은 빛의 소리를 듣다.
모두가 잠든 캄캄한 밤이 지나고
사물의 형태가 눈 앞에 실루엣으로 다가오는 새벽
방 한가운데 빛 한줄기 길게 드리우는 아침과
백열전구 없이도 환하게 밝히는 한 낮
뉘엿뉘엿 온 세상을 물들이는 저녁과
밤하늘 별하나가 내 마음을 훔쳐가는 밤
창문은 하루의 시작이고 끝이다
하얀꽃 조롱조롱 흔드는 개망초
마음을 두드리며 다가오는 빗소리
바람타고 흐르는 빨간 단풍의 속삭임
발길에 밟히고 버려지는 낙엽의 가슴앓이
소담스런 꽃송이 소복하게 쏟아놓은 하얀눈
창문은 계절의 시작이고 끝이다
창문은
시간을 이어주는 마음의 시계이고
계절과 나를 이어주는 생명의 통로이며
사람의 감정을 이어주는 삶의 과정이고
지금과 미래를 이어주는 희망의 바다다
희망을 노래하는 소리이고
절망에 벗어나는 출구이고
세상을 이어주는 빛이며
세상의 상처를 치유하는 쉼이다
내가 너를 기다리는 설렘이고
네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아현동 재개발구역에서
모두다 떠나고 없지만
창문이 들려주는 삶의 소리를 듣는다
창문이 밝혀주는 희망의 빛을 본다
창문이 담아주는 너의 사랑을 느낀다
9. 벽이 아이들을 부르는 소리를 듣다.
벽이 주는 경험이 있다
즐거운 놀이의 시작은 언제나 양지바른 벽 아래
공네에서 제법 넓은 공터에서 시작된다
이른 봄 날 양지바른 벽면 앞에 앉아
만화책을 보다가 딱지를 치다가
구슬치기를 하다가 땅 따먹기를 하곤했다
그러다가 이른 봄 아직은 차가운 바람이 살결을 스치면
따스한 벽에 등을 기대고 재잘거리기도 했다.
벽은 아이들을 모으는 장소이고
벽은 아이들이 뛰노는 놀이의 시작이다
최근 시사정보를 전하는 가장 좋은 매체는 벽이다
벽에서 전해지는 정보는 어김없이 사람들의 입을 통해
동네로 퍼져나갔다.
누구와 누구 사귄다든지, 좋아한다든지
누가 벽에 오줌을 쌌다든지, 그 집 아들 녀석 메롱이라든지....
아이들은 돌멩이 하나로, 크레용 한 자루로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던 것들을 기록한다.
나보다 잘난척 하는 친구들을 놀릴때도
나쁜 짓을 한 친구들을 알릴때도
벽은 그것을 알리는 가장 좋고 빠른 게시판이고 홈페이지였다
벽은 그 벽을 넘어 닿을 수 있는 희망의 시작이다.
나는 예쁜 아이가 있는 집 앞을 서성인다
그 아이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 아이는 어떤 음식을 좋아할까
눈이 맑고 웃는 모습이 예쁜 아이의 창문 아래서
설레고 두근대는 마음으로
그녀와 함께 할 미래를 꿈꾸며
나의 마음을 나눌 그날을 기약하며
그 벽을 훌쩍 뛰어넘을 시간들이
하루 빨리 내게 다가오기를 기도한다
벽은 그것을 넘어 만날 희망이 있어 좋았다
벽은 언제나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벽은 어른들의 간섭을 피하는 쉼터이고
벽은 나의 아픔을 공유하는 치유의 공간이고
벽은 꿈을 나누는 나의 마음이다
내가 어른이 되었다고 느꼈을 때
내가 세상에 지쳤다고 아파할 때
내가 순수함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할 때
나는 벽을 떠나 있었다
그곳이 희망이고 꿈이고 기쁨이었음을
이제가 느끼면서 말이다
아현동 허름한 골목에서 만난 벽도
눈에 삼삼한 그 시절의 벽과 닮았다
오랜 기억의 조각들이 고스란히 널려있고
삶의 시간들이 얼룩으로 낙서로 남아있다
그곳에서
벽이 아이들을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벽이 지쳐가는 우리를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10. 아현동이 들려주는 그 그리운 이야기를 듣다
아현동을 떠나는 것
좋아서 이사하는 것 아닌데
이곳에 많이 그립고 아련할텐데
벽마다 빨리 이사가라 재촉하듯
이삿짐센터 연락처가 벽면을 장식한다
궁색한 살림살이는 이곳에 남겨두고
가난하지만 마음만은 부자이고
소박하지만 꿈은 넘쳐났던 아현동의 기억을
이삿짐에 싣고 떠난다
아현동을 떠나는 것
젖먹이 딸이 자라서 아이의 엄마가 되고
개구장이 아들이 커서 한 여자의 지아비가 되고
아장아장 손주가 자라서 군대에 가고
곱디고운 우리 엄마 천국으로 가고
자식이 커 갈수록 내가 늙어가는 아현동 비탈길
가슴 뚫린 먹먹함에 마음 한구석 아리고
추억으로 숨쉬고 그리움을 먹고 살 나이에
나의 삶이고 노래고 꿈이었던 아현동의 기억을
바람에 싣고 떠난다
아현동을 떠나는 것
붉그레 동터오는 만리동 고개
다투듯 하늘로 솟은 여의도 빌딩 숲
전기줄 널부러진 전봇대에 걸린 태양
빨래줄에 널린 운동화 너머로 지는 노을
목욕탕 굴뚝에 걸려 상처가 부푸른 보름달
언덕길을 따라 드문드문 마음을 밝히는 가로등
이곳에서의 일상들이 한편의 영화가 되어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와도
오래도록 머리 한편에 오롯이 남아있는
내 인생 영화의 아름다운 무대였던 아현동의 꿈을
노을에 싣고 떠난다
모두가 떠난 아현동 재개발구역
벽은 세월의 허물을 훌훌 벗고 있는데
광고란 놈이 몸을 감싼다
그 놈은 성질이 고약해서 웬만한 세월에도 몸이 부서지거나
피부가 벌떡 일어나는 일은 없다
아현동에 살았던 나의 가난하고 소박했던 삶도
긴긴 세월동안 찢어지거나 떨어지지 않게
어머니가 쑤어놓은 풀을 발라
마음에 꼭 붙여놓으리라
불법광고 붙인다고 대문 앞을 서성이던
할매의 뒷모습이 아련하다
주인이 떠난 아현동이 들려주는
그 그리운 추억의 이야기를 듣다 아현동을 재개발하면서 이삿짐 연락처가 벽면을 장식한다
벽은 세월의 허물을 훌훌 벗고 있는데 광고란 놈이 몸을 감싼다
그놈의 성질이 고약해서 웬만한 세월에도 몸이 부서지거나 피부가 벌떡 일어나는 일은 없다
불법광고 붙인다고 대문 앞을 서성이던 할매의 소리를 듣는다
주인이 떠난 벽이 전하는 그 오래된 세월의 이야기를 듣는다
(2008년 12월 서울 마포구 아현동 재개발구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