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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남웅 Sep 17. 2020

18. 인왕산 개미마을 (2016. 01. 01)

흑백사진처럼 빛바랜 기억의 숲





인왕산 정상에 갔다가 개미마을에 들렀다.

눈으로 본 개미마을은 컬러지만 마음에 닿은 개미마을은 흑백이다.

어릴 적 흑백 텔레비전에서 본 드라마처럼 보이는 곳마다 흑백이다.


인왕산 자락 비탈을 깎아서 만든 집

옹벽 위에 위태롭게 지어진 집


함석이나 슬레이트 지붕

하늘을 향해 뻥 뚫린 지붕

천막이나 나무로 막은 비가 새는 지붕


합판이나 천막으로 막은 허물어진 벽

페인트 칠이 없는 시멘트 벽

군데군데 부서지고 금이 간 담벼락


초록색 칠이 벗겨져 속살이 보이는 대문

좁은 처마와 녹이 슨 우체통

나무를 때면 하 연기가 오르던 굴뚝


낮은 천정과 작은 창문

합판으로 이어서 만든 화장실

하늘 높이 연통 달린 연탄보일러


베란다 없이 바로 바깥으로 연결된 방

마당에서 몇 계단 아래로 내려가는 부엌

나무 불을 때느라 검게 그을린 천정


내가 일어서면 닿을 듯 낮은 천정

지붕마다 설치된 텔레비전 수신용 안테나

자주 꺼뜨리고 피기를 반복했던 연탄보일러


나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삶이

나의 유년시절의 기억이

고스란히 이곳에 남아있다.


학교 마치고 집 담벼락 아래에 모여

자치기, 비석 치기, 땅따먹기를 하고

딱지치기, 술래잡기, 공차기를 하고

해가 지기까지 신나게 놀다가

엄마가 부르는 소리에 집으로 돌아갔던


부족하지만 나눌 줄 알고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알고

가진 것에 만족할 줄 알았던

그 시절 그 기억이 이곳에 남아있다.




어릴 적 시골 마을 풍경이다. 1970년대쯤 지어진 집들이 세월에 주름이 생기고 상처가 나서 늙어간다. 이런 풍경이 익숙하다는 것은 나도 그만큼 늙었다는 것이다.


새해 첫날인데 태극기가 걸려있다. 이 집에 사는 사람들은 매일이 특별한 날이어서 일 년 내내 태극기를 걸어놓고 있나 보다. 새들의 노랫소리가 집안으로 울려 퍼질 듯.


남쪽으로 지어진 집 창문 사이로 햇살이 쏟아지는 집에 살고 싶다. 해바라기처럼 해를 보고 구름을 보고 개구리가 부르는 노래를 들으며 따뜻한 마음으로 살고 싶다.  


도둑을 지켜주는 개와 목돈을 만들어 주는 돼지가 늘 함께 있으니 행복하다. 대문을 건너 가족들의 웃는 소리가 동네로 흘러가면 개와 돼지도 활짝 웃는다.


아침에 빨간 오미자 한 잔으로 활기찬 하루를 열고, 저녁에 빨간 포도주를 한잔 하며 하루를 닫는다. 행복이란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것에서 시작한다.


이 집은 사람들의 꿈을 싣고 희망을 품고 세상을 향해 달리는 버스다. 비 내리고 바람 불고 눈보라 치는 세상을 지나 꿈에 닿을 때까지 우리와 함께 달려줄 삶의 보금자리이자 희망이다


해바라기집과 풍선 집이 나란히 서있다. 어느 집에서 더 많은 웃는지, 어느 집에서 사랑의 대화가 많은지 경쟁하며 살아가는 다정한 이웃이다.


주인은 잊지 않고 고양이에게 먹을 것을 준다. 고양이에게 여기가 따뜻한 집이고 행복의 공간이다. 내 음식을 탐내는 큰 고양이와 보기만 해도 쫓아내는 사람만 없으면 말이다.


이 슈퍼의 주인은 전주에서 태어났거나 살았던 사람이다. 듣기에 생소한 외국어 이름이 아니라 자기의 신분을 명확히 하고 정직하게 살겠노라 '전주 슈퍼'라 정한 듯.


비틀스가 개미마을을 걷고 있다. 1970년대 통이 넓은 바지를 입고 갈색 머리를 하고 인왕산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비틀스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오래도록 기억되는 개미마을이길....






(2016년 1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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