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비비를 가릴 때. 사람은 저마다 기준점을 두고 생각한다. 단지 기준점이 ‘나’에서 시작하는가 아님 ‘남’인지, 이 받침 미음 하나 차이는 알게 모르게 우리 마음에 막대한 영향을 주고 있다. 또 그 시작의 차이는 그 사람의 태도에서 선명히 보인다. 매사 여유로울 것인가 조급할 것인가.
“뭔가 태가 있어.” 하트시그널의 인기를 독식하고 있는 여성이 한 남자에게 끌린 이유였다. 여유로움을 머금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인간의 본성은 살아남는 것이고 생존이 희박해진다면 조급해지는 건 당연하듯 조급함은 인간의 기본 습성이라 할 수 있다. 태어난 지 1초도 안 됐는데 울음을 터뜨리는 걸 봐라. 생존이란 본능이 이끄는 울부짖음이 아닐까. 반면 여유로움은 후천적인 성향에 가깝다고 본다. 여유로움에 선행되는 건 풍족함이고 그러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하기에. 회사에서도 꼭 그런 사람이 있다. 별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매번 조급해 보이는 사람. 발걸음부터가 조급하다. 겉으로 볼 땐 ‘무슨 일 있는 건가?’란 생각이 들 정도. 근데 별일이 아니었던 경우. 이런 태도는 상대를 긴장시킨다. 순간 긴장을 하게 된 상대는 본능적으로 방어기제가 펼쳐질 것이다. 간소한 부탁임에도 불구하고 0.5초 만에 흔쾌히 수락할 수 있을까?
반대로 회사엔 태가 있는 사람도 있다. 분명 급한 일로 알고 있는데 여유로워.. 행동 하나하나가 떨림이 없어.. 시크해.. 불안했던 게 무색해질 정도랄까. 그 사람은 표정과 발걸음부터 다르다. 조선시대였으면 선비의 발걸음이렸다. 뒷짐만 쥐고 팔자걸음에 한복까지 입었다면 틀림없이 과거급제한 선비렸겠다. 그의 일 처리와 대화의 논리는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 에이스 그 자체다. 그분과 몇 번 이야기해 보면 안다. 삶과 업에서도 기준점의 시작이 ‘나’에서 시작하는걸. 본인의 역량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본인 선에서 할 수 있는 일, 해야 하는 일의 구분이 확실하다. 그래서 그런지 확실히 눈치를 보지 않는다. 일이 잘못되면 쉽게 인정한다. 사과한다. 또 본인 역량에서 해결할 수 있는 선까지 힘을 보탠다. 살짝 편견 아닌 편견으로 개인주의일 줄 알았던 사람인데 업에 있어선 공리주의에 가깝다. “다 잘 되자고 하는 건데요 뭘~”
결국 지향점 차이이지 않을까. 인생의 목표가 무엇인지도 큰 영향을 주는 것 같다. 어떤 회사를 가는 게 인생의 목표인 사람의 태도는 대게 조급함에 가까웠다. 우리가 그 회사를 가려고 태어난 건 아니지 않나. 본인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게 일이라 해도 여전히 일은 취미가 될 수 없고 인생의 목표라 두기엔 왠지 모르게 쓸쓸하다. 여유로웠던 사람은 다 이유가 있었다. 여기 회사가, 또 본인이 하고 있는 일이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었다. 일은 그냥 일. 하고 싶거나 이루고 싶어 하는 게 뚜렷했다. 그렇게 이상적인 게 아니라 꽤 현실적이면서도 취미에서 발현된 멋있는 꿈이었다. 누구도 질투하지 못할 만큼 아니 질투할 이유가 없이 응원해 주고 싶은 꿈. 그러니 일할 때 여유로울 수밖에. 항상 해피타임일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