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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기명 Nov 23. 2023

나에게 찾아온 세 가지 아아포인트

 광고인에게는 특이한 성향이 있다. 일은 하기 싫은데 막상 없으면 허전한… 일이 없는 공백기만을 기다리며 힘차게 아이데이션하지만, 막상 공백기가 길어지면 슬슬 아이데이션 할 때가 됐지 않았느냐란 생각이 슬며시 올라온다. 광고 말고 다른 직업을 가져본 적 없어 모르겠지만, 이는 비단 광고인만 갖고 있는 성향은 아닐 테다. 10년차에 가까운 선배는 아직까지 아이데이션 자체가 재밌다고 하신다. 당연히 너도 그렇지 않냐는 동조의 눈빛에는 살짝 멈칫했다. 사실 ‘재밌다’란 단어로 설명이 될지 싶었다. 그 단어로 치부하기에는 부족한 복잡미묘함. 살짝 뭐랄까... 툴툴거리는 사람에게 왠지 모를 마음이 더 가는 아리송한 심리에 가까워서 단지 재미로만 치부하기엔 아쉬웠다. 그 정도로 아이데이션 자체를 매력적인 작업 과정이라 개인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본격적으로 아이데이션 회의부터 클라이언트 보고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단계별 감정을 짚어보고 싶다. 간단히 좁혀보자면 아아포인트(“아아”를 외치게 되는)의 3가지 단계가 있다. (아, 참고로 지극히 주관적인 아아포인트이다.)


첫  번째, 아아!포인트

 제작OT를 받을 때는 막막함이 크다. 드문드문 생각나는 단초가 있다면 후다닥 메모해 두고 다시 OT를 이어 듣는 걸 반복한다. 그 이후 책상에 앉아 기획에게 받은 자료와 메모한 내용들을 혼자 쭉 집중해서 정리하는 시간을 갖는다. 고3 수험생 마인드로 팩트북에 형광펜 표시를 쫙 긋고 노션에 아이데이션할 때 알고 있어야 할 배경지식을 모조리 정리한다. 정리가 끝나면 본격적인 아이데이션 시작! 먼저 가볍게 OT 들으며 적은 메모나 여러 자료를 톺아보면서 생각났던 아이디어를 구체화한다. 그래, 원초적이면서 정답 같은 아이디어들은 디폴트로 갖췄으니, 이제는 좀 열어두고 아이디어를 펼쳐보자란 마음을 먹는다. 잠시 화장실을 갈 때나 점심 먹으러 갈 때 심지어 퇴근하면서까지 촉수를 세우고 다닌다. 언제 어디서라도 “아아!”를 외칠 수 있게 센시티브한 촉수를 지니고 산다. 어쩌다 화장실에서 ‘아아!’를 만난 순간, 자리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이렇게 가벼울 수가 있을까. 타자 속도도 한컴타자연습 때보다 더 빨라진다. 이런 아아!포인트가 누적되는 만큼 광고 자체에 대한 자신감도 쌓인다. 팀원들에게 아이디어를 까기 직전까지도 자신감이라고 둔갑한 자만심은 어깨를 가만히 두지 못한다. 옴짝달싹하는 건 마음도 마찬가지. 다소 흥분에 가득 찬 마음과 함께 회의실에 입장하고 곧 세상에 태어날 것만 같은 아이디어를 설명하기 시작한다.


두 번째, 아아?포인트

 가끔 아이데이션 회의하다 보면 이런 말이 들린다. “아;; 내가 먼저 깔걸” 비슷한 단초의 아이디어를 갖고 온 분이 내뱉는 말이다. 반대로 다른 사람의 안을 보다 보면 전혀 생각하지 못한 접근 때문에 “아아?”가 연달아 나온다. 제작OT 막바지에 있는 커뮤니케이션 목표는 하나인데 이렇게 다른 결의 아이디어가 있다는 게 3년이 지난 지금도 신기하다. ‘저 선배는 A 관점을 주안점으로 두었구나’, ‘저 동기는 B 포인트에 푹 빠져있었구나’ 이렇게 남들이 준비한 안을 보면서 내 안들은 커뮤니케이션 목표란 이름의 과녁 품에 들어왔는지 검토하게 된다. 반대로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도 그 과녁 안에 있는지 확인하고 내 마음속의 첫 번째는 무엇인지 우선순위를 매긴다. ‘아아? 저런 생각은 못해봤네.’ ‘아아? 이런 인사이트 괜찮은데?’ 깨달음의 연속이 잔잔한 연못에 던져진 돌멩이가 만든 파동처럼 연달아 올 때도 있다. 선배를 보며 깨닫는 아아?포인트는 계곡에서 신나게 논 후 금방 찾아오는 소강상태와 같다. 대략 30분 만에 흥분으로 가득 찼던 자신감이 바닥을 친지 오래. 같이 밥 먹고 함께 야근했는데 다른 결과물을 가져오는 선배를 보면서 기가 죽기도 했었다. 살짝 분하기도 했다. 이게 세월의 짬밥일까? 오! 소리가 저절로 나오는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는 그 사람만의 노하우가 있는 걸까? 공백기가 찾아올 때 그 선배는 무엇을 하며 쉬고 있는지 지켜봐야겠다는 시기 어린 마인드와 함께 동기부여를 잔뜩 갖고 퇴근한 날이 잦았었다.


세 번째, 아아...포인트

 클라이언트 보고 후 피드백을 받으면서, 더 나아가 보고 중일 때 느껴지는 아아...포인트가 있다. 우리가 제시하는 여러 안 중 어떤 게 셀렉 되는지에서 오는 아아...포인트. 누가 그들의 니즈를 잘 파악했었는지 명확히 알게 되는 시간이다. 보통 클라이언트의 니즈는 이렇다. ‘우리 브랜드가 잘 보였으면 좋겠다’, ‘확실한 컨셉으로 마케팅 전략까지 쉽게 연결될 수 있으면 좋겠다’, ‘기존 광고와 달라 보였으면 하는데 또 너무 달라 보이지는 않으면 좋겠다’ 네?!? 그래서 보통 나는 안을 준비할 때 그들이 좋아할 만한 포인트에 집중한 것도 마련한다.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요구사항을 다 반영하더라도 그 안에서 인사이트나 재미를 불어넣는 게 광고인의 역할이 아닐까. 그 결과 셀렉 되는 안을 스터디해 보면 뚜렷한 인사이트나 달라 보이는 포인트가 있다. 실제로 6초 범퍼광고 건이었는데, 제작비는 턱없이 작아 모델 활용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건 자막플레이나 씨즐의 극대화 정도뿐. 하지만 클라이언트는 자막플레이는 지양해 줬으면 좋겠다고 한 상황. 최소한의 자막플레이로 말맛을 맞추거나 챗GPT 양식을 활용한 이색적인 아이디어 등 다양한 접근을 모색했었다. 결국 팔린 건 귀에 걸리는 카피와 트렌디한 접근이 아닌, 외국인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비주얼의 팝아트 안이었다. 자막플레이가 아닌 팝아트 형식의 모델이 나오는 아이디어라니..! 팀장님의 아이디어였고 클라이언트의 니즈를 정확히 파악하고 가려운 곳을 긁어줬다고 생각했다. ‘아아... 왜 난 팝아트를 생각 못 했을까?’ 2초 반성한 후 다시 회의에 집중한다. 당시에 안을 보자마자 내 마음속의 1번이 되었고 실제로 온에어까지 진행된 케이스다.


 3단계의 아아포인트는 10년차가 되든 20년차가 되든 계속될 테다. 깨달음 없는 회의가 어디 있겠는가. 새로움을 갈구하는 광고 생태계에 살아가려면 새로운 깨달음을 얻으려는 태도가 필요할 것이다. 같이 생활하는 팀 사람들에게도 옆 팀에 있는 대리님, 부장님에게도 배울 게 넘쳐 난다. 센스메이킹이란 단어도 있지 않나. 재택근무로 얻을 수 없는 사회적 공간이 우리에게 주는 깨달음도 있다. 건너편 카피 대리님의 타자 소리 이후 카피 부장님의 피드백. 헤드카피 얼터를 고민하고 몇 분 뒤 다른 헤드카피를 구두로 제안하는 과정. 이런 모습들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으니까 꼭 아이데이션 회의에서뿐만 아니라 회사에선 모든 순간이 아아(!?...)포인트로 넘쳐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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