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바다에 이끌려
바라보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 어떤 거울보다도 분명하게,
바다는 우리가 누구인지
비추어주기 때문이다
릭 루빈, <창조적 행위: 존재의 방식>
바다멍, 불멍, 한강멍. 가만히 멍때리다 보면 잡생각도 잊을 만큼 오로지 나에게만 집중하는 시간이 생긴다. 눈을 감고 하는 명상이 아닌 눈을 뜬 채 하는 '멍상'. 특히 한강이나 장작불처럼 규칙적인 듯 불규칙한 반짝거림에 쉽게 집중하게 된다. 볼 때마다 매번 새롭지 않나. 새로움을 마주치면서도 익숙함에 이르러 마음의 평온을 가질 수 있다는 점 자체가 멍의 매력이다. 우린 매번 같은 하루를 보낸다고 생각하기 쉽다. 오전 7시 기상, 6-2에서 지하철 탑승, 12:30분 점심 식사, 6시 이후 퇴근. 사실 우리 몸이 하루하루 다르게 변하고 있듯, 매번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다. 매일 마주하는 반짝거림의 다름 또한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반짝이는 윤슬. 출근길, 지하철 7호선이 뚝섬유원지역을 지날 때 마주하는 첫 번째 반짝거림이다. 나와 같이 자리에 앉지 못한 사람들은 덕분에 고스란히 윤슬을 눈에 담을 기회를 얻게 된다. 다리 위를 지나는 순간 기관사의 배려인지 안내방송 없이 온전히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다. 오리배들은 잘 정리되어 있나, 혹시나 폐기물이 둥둥 떠다니지는 않을까, 힘차게 한숨을 뱉어내는 물고기의 흔적은 어디 없나, 괜스레 오지랖을 떨어보는 순간이다. 지하철에서 보내야 하는 고독을 잊기 위해선 핸드폰에 의존하지만, 뚝섬유원지역을 지날 땐 자연스럽게 디지털 디톡스를 경험하게 된다.
반짝이는 눈빛. 가끔 갓생을 표방한 생활시간표를 세우기도 한다. 출근 전 헬스. 회사 지하에 위치했고 샤워실도 있어서 그런지 헬스장 가는 시간이 걸린다든지, 운동하고 씻고 다시 집 와서 옷 갈아입고 할 시간이 없다는 핑계는 진짜 핑계가 되어 버린다. 아침에 도착한 헬스장에는 꽤 많은 사람이 있다. 단골도 여럿 있다. 천국을 맛봤는지 천국의 계단에서 내려오지 않으시는 분, 죽기 직전까지 데드리프트할 기세인 분. 할 수 있는 운동이 한정적인 난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잠들어 있던 근육을 자극한다. 사방을 둘러싼 거울엔 반짝이는 눈빛들로 가득하다. 어느새 나도 졸린 눈 대신 무척 힘을 주고 있는 눈으로 상기되어 있다. 아침에 운동하고 일을 하면 신기하게도 피곤함의 무게가 평상시보단 가볍게 느껴지는데 갓생했다는 동기부여 덕분인가 싶다.
반짝이는 웃음. 퇴근 후에는 유독 반짝이는 장면이 잦다. 드디어 개인적인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기대감과 일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 웃음을 미리 예약한 듯 곧 마주한 사람과의 약속. 온 세상이 반짝거린다. 평소에 별다른 약속이 없을 땐 여자친구와 나란히 앉아 아이패드를 틀어두곤 저녁을 먹는다. 유튜브는 라디오처럼 틀어두고 귀에 걸리는 소재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거나 괜한 장난을 친다. 아니면 돌싱글즈의 패널처럼 찰진 리액션과 전혀 예상하지 못한 포인트를 지적한다. 어쩔 땐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하네?”라는 말을 들으며 혼이 나기도. 퇴근 후엔 모든 게 재밌다란 말이 있듯 밥 먹고 소화할 겸 거리를 걷는 것도, K-디저트 붕어빵을 맛보기 위해 웨이팅 하는 것도 이렇게 반짝거리는 하루가 된다니. 다른 관점으로는 회사라는 희생양이 있어서 가능한 반짝이는 행복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