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세상 살만하다 싶었는지 뜬금없는 수법의 호갱을 당했다. 친구 결혼식 축의금을 뽑으려 은행에 간 상황. 두 개뿐인 창구엔 나이 지긋하신 할아버지와 아주머니가 계셨다. 머지않아 자리가 생겨 돈을 뽑고 있는 중 할아버지가 아주머니께 도움을 청하는 듯했다. 자세히는 듣지 못했지만 몇 번의 말을 주고받은 뒤 아주머니는 자리를 떠나셨다. 돈은 다 뽑았고 나가려는 찰나 할아버지가 길을 막았다. 3백만원이 찍힌 명세표를 보여주며 “내 통장이 막혀서 차비를 뽑을 수 없어요. 2만 5천원만 빌려주시면 내일모레에 드릴게요.” 난생처음 듣는 부탁이었다. 80대에 가까운 연배와 포근한 인상 때문이었는지 쉽게 거절을 못 했다. 나이 지긋하신 분만 아니었다면 돈 없다고 차갑게 답했을 텐데… 약간 머뭇거리자 할아버지는 종이와 펜을 꺼내 내 계좌번호를 적어달라고 했다. 일단 돈을 뽑고 이야길 나눠보잔 생각이 들더라. 2만 5천원을 뽑으려는데 생각해 보니 5천원은 출금이 안 되지 않나 자연스레 3만원을 뽑았다. 돈을 드리기 전 나도 그냥 빌려줄 순 없으니 할아버지 핸드폰 번호를 물어봤다. 그분은 핸드폰이 없다며 소극적으로 답했고 대신 내 번호를 적어달라고 하셨다. 그때 느낌이 왔다. 아… 못 돌려받겠구나. 그런데도 차마 은행을 박차고 나가지 못했다. 그냥 드리고 싶은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남아있는 인류애를 시험해 보고 싶었던 걸까? 그 당시의 내 충동적인 행동은 지금도 이해하지 못하겠다. 3만원을 드리자 수수료로 1,300원을 건네시는 걸 보고 괜찮다고 했다. 받으면 뭔가 거래를 하는 느낌이니까. 비상식적인 등가교환의 물물거래였을 테다.
사실 이전에 한 사회 실험 영상을 봤는데 이 잔상이 남아있어서 이 충동적인 상황이 벌어진 듯하다. 관찰 실험의 내용은 이렇다. 서울역에서 치매 걸린 노인이 자기 집이 어딘지 모르겠단 말로 혼잣말할 때 주변 사람들은 어떤 대처를 할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른 척하거나 가벼운 응대만 했고 어떤 사람은 겁에 질린 채 자리를 피하기도 했다. 몇 시간 동안 실험은 계속되었다. 그제야 한 사람이 적극적으로 나섰는데 집이 어디신지, 핸드폰 갖고 계진지 눈을 맞추며 대화를 이어갔고 안내데스크에 배웅해 도움을 받을 수 있게 했다. 이런 관찰 실험류의 영상을 보면 사실 상상하지 않나.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모자이크 된 채 등장하게 될지 환한 얼굴로 인터뷰하고 있을지. 솔직히 내가 저곳에 있었어도 적극적인 도움을 주지 못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요즘 누가 생뚱맞게 말을 걸면 경계의 눈빛을 감추지 못하는 건 사실이니까. 내가 먼저 나서서 선행을 베푸는 건 쉬워도 누군가가 다가와서 도움을 요청하는 건 왠지 모를 기피감이 든다. 하도 도믿걸, 도믿보이부터 기부라는 이름의 다단계, 다양한 수법의 보이스피싱까지 아직 당해보지 못한 호갱 수법이 여럿 있으니까. 이 상황을 겪지 않을 방법은 피하는 법뿐이었다. 낯선 이에게 따뜻한 포옹은 차마 못 하겠는 시대. 돌아오지 않은 3만원은 나만의 인류애 실험 진행비라 생각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