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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들레 Apr 30. 2019

파랑새의 집(작은집,큰집)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우리집

작은집 이야기

"엄마,아랫방 언니 왔어"

저녁밥상을 물리지 얼마 됐을까. 우리집 아랫방에 세들어 사는 베트남 새댁이 현관문 앞에서 우물쭈물 거리며 서 있다.

"어,무슨일 ? 저녁은 먹었어?"

새댁옆에는 무슨일인지 남편도 함께 였다.

 "언니, 우리 이사가요"

서툰 한국말로 이야기를 꺼낸 그들은, 무척 미안해하며 말을 이었다. 아직 20대 중반밖에 안된, 앳된 부부였다.남자애가 근처에서 일을 했는데, 요즘 일감이 많이 없어 그만두고 기숙사가 있는 다른곳으로 옮긴다고 했다.

"정말....사정이 그러면 할수 없지. 미안할게 머 있어. 그동안 있어줘서 우리가 고맙지"


"어머니,아랫방 애들 이사 간데요"

"에구, 또 방 놔야 겠네."

2년동안 우리집에 살면서, 제작년 임신해 아들 쌍둥이도 낳았더랬다.눈이 까맣고 동글동글한 얼굴의 작은 인형같은 아기들이 남이 보기에도 정말 귀여웠으니, 자기 자식이 오죽 이뻤을까. 아기들은 100일이 갓 지났을 무렵, 엄마 아빠 품을 떠나 본국인 베트남으로 보내졌다. 달달이 생활비를 부치면, 할머니와 외할머니가 한명씩 아기를 맡아 키운다고 들었다. 그 아기들이 벌써 돌이 지났다. 매일 영상통화도 하것 같았다. 저 예쁜것들을 보내고, 보고싶어 어찌 사나 싶은데 그들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아기와 떨어지는걸 운명처럼 여기는듯 했다.



엄마 마음은 엄마가 안다. 처음 떼어 놓았을때 얼마나 보고 싶었을지...특히 아기 엄마는 젖먹이와 생이별을 했으니 밤마다 눈물바람 아니었을까. 잠을 자면서도 꿈결인듯 생시인듯 아기울음 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태어나 1년동안 아기는 전생애 가운데 가장 빠른 성장을 거친다. 뒤집고,배밀이하고, 앉고,서고....신통하고 방통한 아기의 일상을 작은 휴대폰 화면으로 보는데 그쳐야 했을 엄마. 하루에도 몇십번, 아기의 뺨에 뽀뽀해주고 안아주고 싶은 마음을 삼키고 또 삼켰겠지.  아쉬운대로 휴대폰을 통해서라도, 그 그리움을 조금이라도 채울수 있어 다

이라 여겼다.


우리집 마당 한켠에, 목수이셨던 시아버님이 헛간을 허물고 손수 벽돌로 지은 작은집.

"엄마, 저 집도 우리꺼야?"

"응~아니야 돈주고 살고 있는 사람들 집이야"

시집와 19년동안 거쳐간 사람들이 가끔씩 생각날때가 있다.이사후 앓던이 빠진듯 시원한 사람, 가는사람 붙잡진 못하지만 아쉬움을 남기는 사람들도 있다. 이 베트남 부부는 동생처럼 마음이 쓰였다. 어쩜 이제 작은집의 마지막 사람들이 될 수도 있겠다는 쓸쓸한 생각도 다.

우리 동네는 오래되고 낡은 주택가여서 방을 보러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지 오래다. 그나마 원룸이나 아파트에 비해 싼 방세를 보고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이 들어와 살고 있었다.제작년 부턴가 근처 공장에 일감이 떨어져, 외노자들이 일을 찾아 다른곳으로 이사하는 바람에 노는 방들이 많이 생겼다. 그나마 살던 원주민들도 신도시 아파트 입주때 썰물처럼 빠져 버렸다.


이 귀여운 베남 부부가 처음 우리집에 이사왔을땐, 베트남 말이 얼마나 시끄럽게 들렸던지. 특히 여름이면, 자주 여럿이 모여 함께 밥을  먹던 그들 무리 때문에 온 동네가 시끌시끌 했었다.타향살이 하느 처지라 그런지 유별나게 모이는걸 즐기는 듯 했다. 사람사는집에 사람소리나고, 사람들 모이는게 자연스러운 건데....어르신들 많은 조용한 동네에서 시끄럽고 지저분하다 타박을 받았다. 이제 그들조차 다 떠나고 몇 남지않은 쓸쓸한 동네가 되었다.


마당에서 빨래를 널다가, 나물을 다듬다 고개만 돌려도 작은집, 작은 창문가로 보이는 사람들.

바깥 현관 옆에 다정히 세워져 있던 자전거. 마당에는 키 작은 건조대가 있었다.밤이면 환하게 켜져 있던 불이 어쩌다 한번 꺼져 있으면 오늘은 외식하려나 싶고,사람들이 왁자지껄 모여 있으면 누구 생일인가 싶고,...나이들어 오지랖만 늘었는지 작은집을 지나며 이런저런 생각들을 했었다. 해가 서쪽으로 기우는 저녁이면, 부엌쪽에서 들리던 달그락 달그락 그릇 씻던 소리, 도란도란 이야기 소리,고소하게 풍기던 음식냄새에 사람사는 훈기가 느껴졌다. 작은 살림살이를 알뜰히 챙기며, 알콩달콩 예쁘게 사는것 같아 보기에 많이 흐뭇했었다.


작은집에 사람이 살고 있었다.

작은 집에서 작은 아기를 낳고 작은 꿈을 키우던 그들이, 가끔은 생각날 것 같다.



큰 집 이야기

우리집은 늘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우리 식구만 해도, 예닐곱이 넘었다. 형님식구랑 삼촌, 조카들까지 더해 아홉이 복작거리며 살때도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식구 많은 집에서 젊은 사람이 고생한다며  나를 측은히 여겼다. 반찬이라 해바야 된장찌게랑 김치 나물 밑반찬 몇가지가 다인데도, 여럿이 함께 둘러앉은 밥상에서 밥먹기 싫다며 깨작거리는 놈 하나 없었다.우리 아이들은 밥을 잘 먹는 아이들이었다.  어쩌다 햄이나 고기반찬이 올라오는 날이면 똑같이 나눠줘야 했다.큰놈이 다 먹어버리면 작은 녀석 먹을게 없기 때문이다. 애가 넷이다 보니 최근까지도 아기 울음소리, 아이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로 늘 시끌시끌하고 분주한 우리집이었다.  그런 우리집이 처음 시집와선 쉽게 적응이 되지 않았다.



친정에 있을때,

단촐한 4식구에 부모님은 장사때문에  보고 나가셨다 별을 보고 집에 오시는, 매일이 고단한 삶을 사시는 분들 이셨다. 난 퇴근후 집에 오면 거의 혼자였다. 혼자 밥을 챙겨먹고, 음악을 듣거나 멍하게 티비를 보곤 했다.  머라 말한마디 섞을 사람도 없었다. 하나 있는 남동생은 얼굴보기가 쉽지 않은 녀석이었다.  남매라 그런지 클수록 서먹서먹하고 말수가 줄어갔다. 난 당시로선 결혼 적령기를 훌쩍 넘긴 노처녀였다. 지금의 남편과 만나 3개월만에 서둘러 결혼하고, 시댁에 들어가 생활해야 했다. 내겐 너무도 낯선 그들과 한솥밥을  식구가 되고 가족이 되어갔다.  


농촌과 도시의 중간쯤 되는 우리 마을에는, 젊은 사람보다 어머니 또래의 어르신들이 많이 계셨다.

새벽이든 밤이든 식때가 되었건, 초대받지 않은 낯선 동네분들이 행님!하고 문을 버럭 열거나 대문을 시끄럽게 흔들었다. 어머님이 계시다 보니,  친구분들이 자주 오셔서 놀다 가셨다. 아즈매들은 한 번 자리에 앉으면 일어서는걸 잊어버린 사람처럼 수다를 떠셨다. 그때마다 난 커피도 끓이고 찌짐도 한장씩 구워 대접하며 분위기를 맞추려 애썼다. 하지만, 겉으로 표현하지 못한 내 본심은 불만으로 가득차 있었다.


"어머니, 아즈매들은 참 이상해요. 어머님두 아즈매들 집에 마실 좀 가셔요. 앞집도 뒷집도 울집보다 더 잘 살고 혼자 계셔서 놀기 좋은데 왜 식구많은 울집에 꼭 오신대요"


야야 사람집에 사람 올때가 좋은기다.
우리집이 편해 그렇겠지.
편한 집이 있니라


 갓 결혼하고 10년동안은 쉽지 았다.

인생이나 삶,이런것을 생각하보다 그저 하루하루 살아내기 바빴다. 우리 아이들 예쁘게 챙기고, 매일 식구들 밥상에 올라가는 반찬걱정 만으로도 벅찼다. 마음에 여유가 없었다. 그런 내가, 어머님 하시는 말씀이 귀에 들어올리가 없었다.  그러다 내 나이 마흔 갑상선암 수술을 받았다. 선물처럼 이 둘도 얻었다. 마흔이 넘어 건강을 잃었다 다시 찾게 되었고,  뒤늦게 얻은 두 딸 나에게 주신 선물임을 알게 되었을때, 난 그동안 끼고 있던 색안경을 벗어 버린듯 했다. 집은 세월속에 더 낡아졌고, 상황은 더 나아진게 없었지만 내가 바뀌어 가고 있었다.


 낡고 오래된 우리집도  사랑스러운 집이 되고, 어머님도 세상 편한분이 되었다. 고급진 아파트가 아니어도, 우리 식구 다함께 모여 따뜻한 밥한끼 나눌수 있는 공간이 있음에 감사할수 있게 되었다. 더 크고 넓은 옆집들, 새아파트 입주한 친구들이 더이상 부럽지 않았다.  오가며 우리 애들 이뻐해주고 안부 전하는 이웃들이 있고, 아이들 재롱에 한바탕 웃을수 있는 우리집. 저녁이면 구수한 된장찌게 보글보글 끓여,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소박한 밥상을 마주할 수 있는 우리집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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