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출할 때 어머님께 이불빨래를 부탁했는데 깜박하셨나 보다. 집에 왔을 때 이불이 세탁기 속에 탈수된 채 그대로 있다. 거의 해 질 무렵, 바쁘게 내다 널었지만 마른하늘에 곧 비 소식이 있어, 마당의 이불을 걷어 들여야 했다. 그새 말랐을까 걱정했는데 까슬까슬 잘 마른 빨래 냄새에 마음을 내렸다. 밤이 내려앉은 뒤, 마당에 남아있는 온기는 늦은 빨래를 말려주기에 충분했나 보다.
뜨거운 한낮의 태양이 봄을 자꾸만 밀어내고 있다.
이맘때...
봄이라 해야 하나 초여름이라 해야 하나.
아이들 성화에 못 이겨 선풍기를 꺼내긴 했지만, 더우면 샤워를 하고, 아님 커다란 부채를 설렁설렁 흔드는 것만으로 견딜만하다.낮기온이 30도를 훌쩍 넘어버려도 , 아이들 옷을 얇게 입히는 건 망설여지는 엄마마음. 잠이 들기 전 깜박 창문이 열린 날이면, 밤손님처럼 슬금슬금 스며든 차가운 공기에 두어 번 잠을 깨곤 했다.
아이는 두꺼운 이불을 덥다 밀어냈지만 아직은 찬 새벽 공기를 막아줄 이불이 필요하다. 어머님께선 기침이 잦아지셨고, 막내는 열이 올라 병원 신세를 질 뻔했다. 한겨울에도 앓지 않던 감기를 오뉴월에 치르게 되다니... 오후엔 식곤증이 기승을 부려 정신을 못 차릴 정도다. 식사 후 진득이 붙어 갖은 애를 써도 떨어지지 않는다. 봄의 끝자락에 겨울잠 덜 깬 개구리처럼 헤롱 거리니 늘 머리가 무겁다.
그럼에도, 오월은 사랑스러운 계절이다.
초저녁 서쪽하늘이 붉어지면 , 마을 뒷산 아카시아 나무의 꽃향기가 시원한 산바람을 타고 우리 집 앞마당까지 마실 나온다. 저녁 설거지가 끝나면 밖에 나가자 조르는 아이들에게 못 이겨 겨우 마당에 끌려 나와도, 옷자락에 묻어나는 아카시아 꽃향기와 별빛처럼 맑고 높은 아이들 웃음소리에 곧 무릉도원이 부럽지 않다. 도시에서 자라 갓 시집온 새댁은 반촌에서 만나는 모든 것이 어린아이처럼 신기했었다. 그땐 계절도 꽃도 향기도 낯설기만 했는데, 십 수 번의 계절이 바뀌고 나니 몸이 먼저 계절을 기억한다.
"야야~ 비가 올라는지 몸이 억수로 찌뿌둥하고 무겁데이. 비 온다 소리가 없었는데 바람이 몰고 왔나 보네."
"저두 몸이 좀 그래요. 어머니"
마흔여덟 해를 산 며느리는 일흔아홉 번의 봄을 보낸 시어머니의 뒷모습을 닮아간다.
어머님께서 몸이 무겁다 하시면, 곧 하늘에 비 소식이 있다. 추적추적 뿌리는 빗소리를 듣자니 조금 뿌리고 말 비가 아니다.
이 비가 그치면 마당 구석구석
초록 이파리 위와 빨래 건조대위로
뽀얗게 앉아 있던 송악 가루가 말갛게 씻길 게다
가물어 쪼글아들던 밭 아이들이 단비에 피어나면
울 엄니 마음도 활짝 필 것이다
아카시아 꽃향기도 아쉽게 그치겠고
어쩜 오월과 함께 봄도 안녕하겠지만,
곧 청포도가 탐스럽게 익어가는 푸른계절이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