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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블린 연구소 Jan 24. 2022

소녀감성으로 아저씨를 울린 이야기

'달러구트 꿈 백화점'을 읽고.

드디어 읽어 보았다. 내가 체감하기에 2021년도에 가장 많이 선택받은 책 ‘달러구트 꿈 백화점’ 말이다. 서점에 갈 때마다 항상 베스트셀러 매대 제일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기사를 검색해 보니 실제로도 작년 가장 많이 팔린 도서가 맞았다.) 그래서 구매를 더 망설였다. 인공감미료가 잔뜩 들어간 라면처럼, 말초신경만을 자극하는 재미와 값싼 감동을 버무린 소설일 거라면서 애써 외면하곤 했었다. 젊은 작가가 처음으로 쓴 작품이라는데 깊이도 별로 없겠지 하는 지레 짐작도 있었다. 그래도 결국 읽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해가 바뀌어도 그 인기가 도무지 식을 줄 모르기 때문이다. 무슨 내용이길래 이처럼 오래 사랑받는지 궁금해서 한 번쯤 읽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잠이 든 사람들이 잠옷을 입은 채로 꿈을 파는 마을로 향한다. 그곳에는 길을 따라서 꿈을 만드는 공방이라든가 꿈꿀 때 필요한 아이템, 예를 들면 따뜻한 잠옷, 수면 양말, 평온함을 주는 쿠키 등을 파는 가게들이 줄지어 있다. 가장 중심에는 달러구트 꿈 백화점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에서 온갖 꿈을 살수 있다. 티베트에서의 꿈같은 일주일간의 휴가도 있고, 고래가 되어 태평양을 누빌 수도 있다. 짝사랑하던 이와의 데이트는 물론이고, 연예인이나 역사 속 인물을 만나서 티타임도 나눌 수 있다. 당연히 시험공부를 전혀 못하고 시험을 치르거나, 군대 가는 날 아침을 체험하는 악몽도 구비되어 있다.


자신과 오늘 밤 함께 할 꿈을 고를 수 있다는 착상이 참신했다. 사람들이 꿈 백화점에서 선택하는 꿈을 통해서 우리가 평소에 무얼 바라는지, 어떤 고민이 있는지, 또 꿈이 삶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주는지 지켜볼 수 있었다. 어떤 사람들이 꿈에서 영감을 얻어서 Yesterday 와 같은 명곡이나 고전으로 길이 남는 문학작품을 쓰게 되는지, 왜 우리는 굳이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상황을 꿈속에서 만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 설득력 있게 풀어나간다. 신이 사람의 시간 중에 3분의 1이나 잠을 자면서 보내도록 만든 깊은 뜻을 헤아려 볼 수 있었다.


아쉬운 점도 있다. 몇 가지 설정이나 묘사가 중년 아저씨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핑크 핑크해서 쉽게 동감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다. 또 ‘다른 이의 삶을 동경했지만 막상 그 사람의 삶을 살아보니, 나의 인생도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라는 등의 익숙한 교훈들도 조금은 지루하게 이어진다.


이 소설이 가진 또 다른 셀링 포인트는 작품을 쓴 이미예 작가의 스토리다. 공대를 졸업하고 반도체 엔지니어로 일하면서 이야기를 구상하고 습작하다가 쓴 데뷔작에서 만루 홈런을 쳤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주말 소설가들이 ‘지금 생각 중인 작품만 완성되면 당장 이 직장 떼려치고 만다’고 다짐하면서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다. 그들은 이미 헐어버린 위장에다가 또다시 진한 커피를 들이부으면서,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 글을 쓰고, 고치고, 또 고친다. 백만 권 가까이 팔렸다는 이 작품을 읽노라면, 나보다 늦게 공부 시작했는데 벌써 합격해서 신림동을 떠나는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심정이 된다.


‘흥 그러면 그렇지. 너무 소녀감성이야. 역시 내가 읽을만한 소설은 아니었어.’라고 생각하면서 결말이나 확인하자면서 끝까지 읽었다. 그런데 끝부분쯤에 갑자기 아저씨의 가슴을 울리는 스토리가 들이닥쳤다. 내가 느끼기에는 이 소설이 지닌 감동 중에 90%가 마지막 장 ‘익명의 손님께서 당신에게 보낸 꿈’에 농축되어 있는 듯했다. 삶과 죽음이 우리의 꿈과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 감동적이고 억지스럽지 않게 이야기해 준다. 책을 덮고 한참이나 천장을 바라보면서 각막에 고인 물기를 말리고, 코끝의 찡함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오랫동안 연락하지 못했던 소중한 이를 떠올리며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이 정도면 작년에 가장 많이 팔린 책이 될만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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