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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블린 연구소 Feb 26. 2022

동물 진화의 현장을 구경하다.

'낙타는 왜 사막으로 갔을까'를 읽고.

고래는 말이나 사람과 같은 포유류다. 허파로 호흡을 하고 자궁에서 태아를 키운다. 그런데 왜 공기가 무한대로 널려있고, 새끼에게 젖을 물리기 편한 들판을 놔두고 심해로 들어갔을까? 그 이유는 낙타가 풍요로운 북아메리카 대륙을 떠나 모진 사막에 정착한 사연과 같았다. 위험한 포식자나 드센 경쟁자들이 접근하기 꺼려 하는 곳에 뿌리내릴 수 있다면 보다 안정적인 삶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학교 도서관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낙타는 왜 사막으로 갔을까(최형선 지음)’라는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 책에서는 고래와 낙타를 비롯한 8가지 동물의 조상들 내력과 속사정을 소상하게 밝히고 있었다. 다양한 동물들이 어떤 진화 과정을 거치며 지금의 모습을 가지게 되었는지, 그들만의 생존 방법은 무엇이었는지 지켜볼 수 있었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도 더러 있었지만 새롭게 알게 된 지식들도 많았다.


 긴 역사를 거쳐서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동물들은 다양한 형태와 생활습관을 가지고 있다. 예컨대 건조하고 척박한 기후의 호주 대륙에서는 태아를 주머니에서 키울 수 있는 캥거루가 진화했다. 혹독한 환경에서는 어미 자신의 몸도 건사하기 힘든데, 점점 커지는 태아를 뱃속에 넣고 다닐 여력이 없었다. 자궁이 커지면 몸이 둔해질 뿐 만 아니라 영양소도 많이 필요하다. 그래서 유대류들은 젖꼭지 앞에 주머니를 만들어서 새끼가 아주 작을 때 출산해서 키우는 전략을 선택했다. 또한 박쥐는 포유류지만 하늘을 날 수 있는 능력을 겸비함으로써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체 무게를 줄여야 했기 때문에 다리뼈가 약해졌다. 그래서 녀석들은 길게는 서있기 힘든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박쥐가 거꾸로 매달려서 당신을 쳐다보는 이유는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만들려는 것이 아니고, 비행 능력 대신 치르게 된 대가일 뿐이다. 캥거루의 앞주머니, 박쥐의 기괴한 모습 모두 오랫동안 지속된 생존을 위한 몸부림의 결과다.


 책에서는 종을 보전할 수 있는 중요한 조건으로 유전적 다양성도 언급한다. 예를 들면 고양잇과 맹수 중에서 호랑이나 사자, 표범 등은 여러 종류가 지구 곳곳에 생존해 있다. 하지만 치타는 현재 하나의 종 밖에 남아있지 않고, 그것마저 서로 간의 유전자가 99퍼센트 일치해서 집단 유지가 위험한 상황이다. 반면, 일본원숭이는 짝짓기를 할 때 같은 영역의 수컷은 멀리함으로써 본능적으로 근친 교배 확률을 줄였다. 그 결과 일본원숭이들은 풍부한 유전자를 가지게 되었고 여러 환경에 대처할 수 있도록 진화했다. 폐쇄적인 무리 운영에서 벗어나서 외부로부터 새로운 피를 받아들이려는 시도는 야생동물의 존폐에도 중요했다. 인간 사회와 마찬가지로 그들도 순혈주의에만 집착하다 보면 생존 경쟁력은 저하되고, 유전자 속에 숨어있던 열성인자들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이 밖에도 종족을 유지하기 위한 동물들의 흥미로운 비법을 엿볼 수 있었다. 낙타가 사막에서 버티기 위해 등에 난 혹에다가 영양분을 저장해 둔다는 건 더 이상 비밀도 아니다. 하지만 기러기가 공기가 희박한 에베레스트를 넘기 위해 기낭과 산소포화도 높은 헤모글로빈을 이용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코끼리 무리에 새 생명이 태어나면 엄마는 물론이고, 이모와 외할머니까지 공동육아에 참여함으로써 아기의 생존율을 높인다. 인상적인 것은 외할머니 코끼리는 폐경기가 지나고도 10년 넘도록 가족과 함께 지내면서 손주들을 돌본다는 사실이었다.


 사람들은 수의사는 많은 종류의 동물에 대해서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물론 수의학과 시절에 인간의 삶과 밀접하게 연관된 가축에 대해서는 비교적 자세히 배운다. 하지만 그 이외의 축종에 대해서는 기본적인 해부와 생리를 접하는 수준이다. 그나마도 졸업 후에 자신이 택한 분야에 집중하게 되면, 주로 만나는 동물 이외에는 거의 일반인과 다를 바 없는 시각을 가지게 된다. 집에 놀러 온 딸 친구들이 동물의 왕국 질문을 퍼부어도, ‘아저씨가 수의사는 맞는데 그런 건 잘 모르겠는걸’로 일관해서 초딩군단의 동심을 멍들였던 일이 다반사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이웃이 자신의 반려 이구아나 병원 진단 결과에 대해 물어보아도 속 시원하게 설명해 줄 수 있는 처지가 못 되었다.


 동물과 관련된 다큐멘터리나 서적을 만나게 되면 주의 깊게 본다. 동물 전반에 대해 폭넓은 지식을 쌓는다거나, 수의사에게 바라는 기대감을 충족시켜야 한다는 거창한 목표 같은 건 없다. 일 년 내내 동물을 접하는 직업이다 보니 진심으로 좋아하게 되었고, 그래서 조금 더 깊이 그들의 속사정을 이해하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동물들의 역사나 사연을 듣고 있노라면 나의 일상생활이나 인생사에 비추어 생각해 볼 것들도 떠오르곤 한다.


 그 동물은 포식자에게 쫓겨서 바닷가까지 도망을 왔다. 폐를 토해낼 듯이 거친 호흡을 했지만 숨이 가다듬어 지진 않았다. 바람이 세차게 불었고 바닥은 초록색 이끼가 미끌거리는 바위였다. 이내 발밑에서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자신을 노리는 이가 지척에 도달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놈의 날카로운 이빨이 떠올랐다. 눈앞에는 끝없는 수평선뿐이었고, 자신의 뱃속에서는 아기가 움직였다. 살기 위해서는 다른 선택은 없었다. 용기를 내서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다. 네 발로 헤엄치는 것이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점차 익숙해졌다. 그 후 바다 수영에 용기를 냈던 친구들은 살아남았고, 그렇지 못했던 이들은 사라져갔다. 후손이 거듭될수록 불필요한 뒷다리는 퇴화되고, 추진력을 담당하는 척추와 꼬리 근육은 더욱 견고해졌다. 콧구멍은 점점 눈보다 위쪽으로 올라가더니, 결국은 정수리에 위치해서 물속에서도 한결 호흡이 쉬워졌다. 중력을 약화시키는 물의 부력 덕택에 지구상 생명체 중에서 가장 커다란 덩치도 가지게 되었다. 선대는 포식자에 쫓겨서 어쩔 수 없이 바다로 뛰어들었지만, 지금 그들에게는 특별히 경계할 자가 없는 살기 좋은 곳이 되었다. 말 그대로 블루오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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