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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블린 연구소 Jul 08. 2022

무더운 계절에 떠나는 이스탄불의 겨울밤

오르한 파묵 '내 이름은 빨강'을 읽고.

 문 밖은 편자를 달구는 화덕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며칠간 책과 함께 이슬람 국가의 서늘한 겨울밤에 머물 수 있었다. 두개골이 깨진 채로 깊은 우물에 던져진 사내는 억울해서 저승으로 건너가지도 못하고 자신의 사연을 풀어놓기 시작한다. 독자들은 순식간에 1591년 이스탄불에서 일어난 으스스한 살인 사건 현장으로 안내된다.


 200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오르한 파묵(Orhan Pamuk)의 ‘내 이름 빨강(My name is Red)’은 오스만제국에서 활동하던 세밀화가들의 이야기다. 그들은 이슬람 전통에 따라서 오직 신의 눈으로 바라본 세계를 화폭에 옮기는 것이 진리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시선으로 해석하고 원근법으로 재현되는 유럽의 그림은 불경한 것이었다. 그들은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물감병으로 동료의 머리통을 내리치고, 자신의 화풍이 변화되는 것을 경계하며 바늘로 자기 눈을 찌른다.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가치를 지키려는 자와, 외부로부터 밀려들어오는 문물을 수용하려는 사람들 사이의 갈등은 어느 시대이건 존재했다. 이러한 충돌 상황을 배경으로 그림을 수련하던 시절의 어려움, 화원으로 살아가야 하는 삶의 고단함, 절대적인 미를 추구하는 연로한 장인의 끊임없는 정진이 그려진다. 여기에 스승의 딸과 제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밀고 당기는 사랑의 체스 게임이 더해져서 이야기를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소설은 59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장마다 화자가 바뀌어서 이야기를 진행해 나간다.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은 물론이고, 죽은 자와 살인자도 전면에 등장해서 사건을 서술한다. 특히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하는 부분은 피해자가 자신이 살해당하는 순간을 묘사하는 장면이다. 글자만으로도 현장에 흩뿌려진 뇌수와 빨강 핏덩어리를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심장이 멈추고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도 죽은 자의 진술은 이어진다. 마지막 숨이 빠져나간 후에는 어떤 느낌이 드는지, 자신의 머리를 내리친 살인자가 나의 시신을 조문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는지에 대한 묘사가 대단히 새로웠다. 읽으면서 사후 세계가 막연히 두렵거나 동떨어진 곳이 아니라, 삶과 한 줄로 연결된 인생의 일부분이라는 걸 생각했다.


 주요 스토리도 흥미롭지만, 사건이 펼쳐지는 공간인 16세기 말엽 오스만제국의 여러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점도 페이지를 쉽게 넘기도록 만들었다. 이발소에서는 머리 감기는 대야를 사슬로 묶어서 천장에서 늘어뜨려 놓았고, 그 시절 최고의 엔터테인먼트의 장소인 커피숍에서는 늙은 이야기꾼이 여장을 하고 무대에 앉아 있었다. 플랑드르와 베네치아에서 밀수입된 위조 은화가 시장의 문제로 떠오르고 있었고, 이슬람 궁궐의 지엄함과 장대함도 구경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방안에 빛이 가득 차면서 영문을 알 수 없는 술렁거림 속에서 ‘세상의 은신처이자 번영이신 술탄’을 알현하는 장면은 글로만 읽어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소설에서는 유럽을 ‘이교도’라고 칭하고 있었다. 이 점이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흔히 ‘이교도’라 하면 한 손에는 코란을 다른 손에는 초승달 모양의 칼을 들고 콘스탄티노플같은 기독교 세계를 공격하는 이슬람인들을 떠올린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유럽과 미국이 바라보는 시점에서 역사를 배우고 세상을 접했는지 느낄 수 있었다. 작품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튀르키에와 페르시아 역사와 사회에 대해 관심이 생겼고, 아나톨리아 반도 여행이 인생 버킷리스트에 추가되었다.


 재미있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한 장 한 장 읽어내는데 에너지가 굉장히 많이 소모되는 느낌도 있었다. 중세 이슬람의 예술과 미술 사조에 대한 현학적이고 철학적인 고찰과 토론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부분이 있다. 그 페이지들은 그저 눈동자에 한 번 묻혀본다는 심정으로 꾸역꾸역 읽어 내려갔다. 끊임없이 뇌세포를 총동원해야 거칠게라도 이해할 수 있었는데 그저 지루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만큼 내가 몰랐던 분야에 대해 조금이라도 지식을 쌓았고, 다음에 다른 어렵거나 두꺼운 책을 상대해서도 물러서지 않을 내공을 기를 수 있었다.


 표면으로 드러나는 줄거리는 살인사건 범인을 추적해 가는 과정이지만, 그 속에 흐르는 주된 내용은 궁중화원 각자의 예술에 대한 가치관 이야기였다. 인생을 걸고 정진했던 아름다움의 기준이 변할 수 있음을 알게 된 이들은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다. 평생 그림을 그렸던 화원장은 신념을 지키기 위해 눈이 머는 것을 신의 축복으로 여긴다. 그들의 사연이 궁금하다면 하늘에는 초승달이 떠있고 발밑으로는 잔설이 부서지던 술탄의 땅 어느 겨울밤으로 떠나 볼 것을 권한다. (단 충분한 인내력과 불면의 여름밤과 뇌에 당이 떨어지지 않게 공급해 줄 큼지막한 초콜릿도 준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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