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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블린 연구소 Jan 07. 2022

로버트 두고니 '내 동생의 무덤'을 읽고

트레이시와 동생 세라는 우애가 각별한 자매였다. 세라는 다 커서도 어둠이 무섭다면서 언니가 자고 있는 침대로 파고들고는 했다. 고등학교에서 화학을 가르치는 트레이시는 사격에도 재능이 있어서 지역 대회에 출전해서 매년 우승을 차지한다. 하지만, 몇 년 뒤에 강력한 도전자가 나타나는데 동생 세라였다. 둘은 대회 결승전에서 맞붙게 되고, 세라는 언니를 위해 일부러 과녁을 맞추지 않는다. 트레이시는 눈치를 채고 동생에게 화를 내지만, 오늘은 언니가 청혼을 받은 날이니 모른 척해달라고 한다. 트레이시는 속 깊은 동생의 배려를 받아들이고 결혼할 사람과 저녁을 먹기 위해 대회장에서 세라와 헤어진다. 동생에게 조금 돌아가더라도 국도는 타지 말고 고속도로만 이용해 집에 가라고 신신당부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날 이후 트레이시는 동생 세라를 만나지 못한다.

세라의 실종 후 마을에서는 대대적인 수색이 진행되지만 끝내 세라는 발견되지 않는다. 수사가 시작되고 범인으로 지목된 이는 성폭행범으로 옥살이를 하다가 나온 에드몬드 하우스라는 인물이었다. 피해자의 시체가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지역 보안관과 검사는 여러 정황을 증거로 그를 검거하고 종신형을 구형한다. 하지만 트레이시는 범인 추적 과정을 지켜보면서 수사와 재판에 석연치 않은 점이 있음을 느낀다. 자신의 의문점을 재기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트레이시는 동생 사건을 직접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경찰이 되기로 결심한다. 그 후 마을을 떠나 인근 대도시 시애틀에서 강력반 형사로 활동하면서 틈틈이 동생의 흔적을 추적하지만 이렇다 할 진전이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고향의 버려진 탄광에서 동생 유해가 발견되고 트레이시는 20여 년 만에 자신이 자랐던 마을로 돌아온다.


변호사 출신 작가 로버트 두고니가 쓴 ‘형사 트레이시 시리즈’는 전 세계적으로 800만부 이상 판매된 베스트셀러다. 이번에 읽은 ‘내 동생의 무덤’은 시리즈 첫 번째 이야기로 주인공 트레이시가 형사가 되는 동기와 과정을 자세히 지켜볼 수 있다. 도체와 부도체, 유기물질 등을 교실에서 설명하던 고등학교 선생님이 20대 중반에 경찰학교 입학을 마음먹는 모습이 실감 나게 그려진다. 새로운 히어로의 탄생 이유가 동생에게 가지는 애틋한 감정이라는 점이 인간적이어서 더 매력적이다. 물론 어린 시절부터 지역 사격대회를 휩쓸던 비범한 재능은 트레이시의 영웅적 면모를 배가 시킨다.


소설을 읽으면서 주요 줄거리가 다른 작품에서도 접했던 이야기 흐름이나 구성들과 유사하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 예컨대, 긴 세월이 지나고 난 시점에서 다시 옛날 사건을 되짚어 본다는 설정은 스티그 라르손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이나, 정유정 ‘7년의 밤’에서도 나온다. 또 지역 구성원 다수가 각자의 이익이나 신념 때문에 사건의 진실을 숨긴다는 점은 넬레 노이하우스 ‘백설공주에게 죽음을’ 이나, 히가시노 게이고 ‘블랙 쇼맨과 이름 없는 마을의 살인’에서도 볼 수 있었던 내용이다. 그렇지만 기시감을 느끼면서도 페이지가 쉽게 넘어가는 걸 보면 인간이 재미있어하는 스토리가 사실은 모두 비슷하다는 걸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물론 이런 이야기 구조를 따른다고 해서 모두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익숙한 흐름 속에 독창적인 무언가를 녹여내야 독자들을 끌어당길 수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작가 재능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등장인물들을 만나면서 나이듬과 공동체에 대한 의미도 여러 번 되새겨보게 되었다. 20년 전 지역 유력인사로 세라 사건을 수사하고 재판했던 인물들이 현재는 기력이 쇠락한 노인들로 그려진다. 그들은 이제 단지 몇 계단을 오르기에도 숨이 가쁘고, 뚜꺼운 안경은 얼룩져 있으며, 귀도 잘 들리지 않는다. 누구도 비켜갈 수 없는 세월의 무거움을 소설을 읽으면서 체험할 수 있었다. 그들은 오래전에 벌어졌던 불행한 일이 트레이시를 비롯한 마을 주민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는 것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끝까지 다른 사람들을 위해 행동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나도 어느 사이엔가 나이가 들었고, 내가 속한 사회나 분야에서 책임이 점점 무거워짐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책의 또 다른 매력은 사건이 펼쳐지는 시점이 겨울이라 요즘 시기와 환경적으로 쉽게 동화된다는 점이다. 왠지 겨울에 더 추울 것 같은 시애틀 지역이 배경인데, 그곳에 폭설이 내리고 트레이시는 눈 폭풍을 헤치고 범인을 쫓는다. 법정의 판사는 창밖 날씨를 살피면서 해가 지고 길이 얼기 전에 심리를 끝낼 수 있도록 재판 속도에 박차를 가한다. 한파가 한창인 요즘에 발치에 스토브 하나 켜두고 귤을 까먹으면서 읽으면 긴 겨울밤도 금세 지나간다. 그러다 보면 동생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화학교사를 그만두고 형사가 된 새로운 영웅서사의 시작 트레이시 크로스화이트를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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