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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블린 연구소 Aug 05. 2022

내 걸음을 멈추게 한 그림은.

국립중앙박물관 '어느 수집가의 초대'전을 보고나서.

 이번 휴가지로 서울을 택했던 이유 중에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어느 수집가의 초대’전을 보기 위해서도 있다. 고(故) 이건희 회장 유족의 문화유산 기증 1주년 기념전으로, 이 회장이 생전에 수집했던 미술품 중 일부를 일반인들에게 공개하는 특별전이었다. 예매표는 인터파크로 풀리자마자 바로 매진되었다. 남은 방법은 관람하는 날 창구에서 현장 판매분을 구매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름대로 머리를 쓴다고 주말을 피해서 화요일 아침에 박물관을 찾았다. 당일 판매는 10시부터였지만, 9시 30분에 표 파는 곳에 도착했다. 평일인데다가 오픈 30분 전이었지만, 표를 구하려는 행렬이 똬리를 틀고 있는 뱀처럼 굽이굽이 몇 바퀴를 돌고 있었다. 직원에게 상황을 물어보니, ‘여기부터는 최소 2시간은 기다려야 하고, 내 차례 전에 표가 매진될 수도 있다’고 대답을 들었다.

 

 우리 가족이 뭐 대단한 미술 애호가도 아니고 포기할까도 싶었다. 건물 위 거대한 지붕이 햇빛은 가려준다고 해도, 습하고 더운 공기까지 차단해 주진 못했다. 해가 높아질수록 지표면의 온도는 올라가고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래도 기다려 보기로 했다. 요즘은 모든 걸 인터넷으로 예약하고 식당 대기표도 카카오톡으로 날라온다. 요 근래에 들어서 가장 오랫동안 줄을 섰던 시간이었다. 기다린 지 2시간 만에 3시 반에 입장하는 표를 손에 넣을 수 있었고, 스마트폰을 확인하니 온도는 31도였다.

 

 미술은 잘 모른다. 어린아이가 장난한 것 같은 추상화는 아무리 들여다봐도 뭘 그린 건지 알 수 없었다. 시간 흐름에 따라 달라지는 색채의 변화를 표현했다거나, 원색의 과감한 사용과 붓의 자유로운 필치를 느낄 수 있다는 등의 미술 사조 설명은 나를 잠들게 만들었다. 그렇게 캔버스에서 한걸음 물러서게 된 후에는 내 삶과는 관계없는 분야라고 멀찍이 치워두었다.

 

 그림에 대한 나의 입장을 결정적으로 바꾼 계기는 2018년도 런던 여행 때이다. 내셔널 갤러리를 구경하게 되었는데, 일행 중 누군가의 제안으로 현지 가이드를 듣기로 했다. 안내를 맡은 선생님은 20대 중반 정도였고, 영국에서 그림을 전공하는 학생이었다. 목에 무선 송신기를 걸고, 귀에는 이어폰은 꽂고 우리는 유치원생들처럼 가이드를 따라다니며 갤러리를 관람하기 시작했다. 안내를 들으면서 그림을 보니까 감상이 즐겁다는 걸 느끼게 되었다. 그곳에 걸려있는 그림이 교과서에서 보던 유명한 그림이라서가 아니었다. 이 화가는 빛을 어떻게 표현했는지, 이 작품에서는 신과 인간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했는지, 지금 화폭 속에서는 어떤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알고 보니 두 시간 정도가 금방 지나있었다. 설명이 없었다면 인스타용 사진만 찍다가 다리만 아플 뿐인 의미 없는 미술관 투어였을 것이다.

 

 그 후에는 일상에서 불쑥불쑥 마주치게 되는 미술을 가능하면 만끽하려고 노력한다. 여행 가는 곳에 미술관이나 갤러리가 있으면 시간을 내서 꼭 가보려고 노력한다. 신문에 정기적으로 실리는 5문단 정도의 미술 관련 칼럼도 꼼꼼하게 읽고, 관련 내용도 더 검색해 본다. 에어비앤비로 묶게 된 남의 집 곳곳에 걸려있는 액자들이 마음에 위안을 준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꼭 텔레비전에서 소개되는 명화나 값비싼 작품일 필요는 없다. 내 마음에 맞는 그림이 나의 시선이 걸리는 곳에 있으면 하루가 더욱 윤택해진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도착한지 6시간 만에 들어간 ‘어느 수집가의 초대’ 특별전에는 과연 볼만한 것들이 많았다. 그림과 글을 비롯해서 각종 조각, 도자기, 공예품까지 있어서 하루 일정을 꼬박 투자해서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대표 전시물로는 이중섭 ‘황소’, 클로드 모네 ‘수련’, 박수근 ‘한일’등이 있었다. 국가대표급 그림인 정선의 ‘인왕제색도’도 얼마 전까지 이번 전시에 소개되었다가 지금은 수장고에서 쉬고 계신다고 했다. 네임드 작품들이 나의 눈을 유혹했지만, 가장 오래도록 나의 걸음을 잡아둔 것은 상대적으로 덜 유명한 세 개의 그림이었다.

 

 의도한 적은 없었지만 어쩌다 보니 말이라는 동물이 내 인생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역사 책을 읽거나, 예술작품을 감상할 때도 말이 등장하면 자연스럽게 한 번 더 보게 된다. 박노수가 그린 ‘산정도’라는 그림인데 단순한 선으로 핏줄이 튀어나올 것 같은 말 근육을 잘 묘사했다. 머리를 들어 올린 자세도 다른 그림에서는 볼 수 없었던 모습이다. 말과 바윗덩어리들의 세찬 힘이 신비한 푸른색 속에 잘 조화되어 있었다.

 

 박남성의 ‘불국 설경’이라는 작품도 좋았다. 불국사는 2년 전 여름에 갔었는데 더웠던 기억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림에서는 사찰의 지붕과 처마, 소나무에 눈송이가 피어있어서 절로 청량함을 느낄 수 있었다. ‘한 여름 무더위에 지쳤을 관람객을 겨냥해서 걸어놓았다’는 학예사의 의도가 정확히 적중했다.

 

 이번 특별전에서 가장 좋았던 작품은 박래현이라는 여류 화가가 그린 ‘피리’라는 그림이었다. 시원함이 느껴지는 나무에 걸터앉아 피리를 불고 있는 소년의 뒷모습이 한가로워 보였다. 무엇도 눈치 보지 않고 편하게 다리를 꼬고 있는 모습이 매력적이었고, 휴가를 즐기는 중인 나의 마음과도 잘 맞았다. 그림에 얽힌 사연도 알게 되었는데, 이 작품은 작가가 갓난아기를 키우면서 그렸다고 한다. 물애기가 얼마나 엄마의 손이 많이 가는지를 잘 알고 있다. 화가가 이처럼 여유로운 그림을 그리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지 상상하니 미소가 지어졌다.

 

 다시 펼쳐 볼 것 같지 않아서 도록은 잘 사지 않는데, 이번에는 망설임 없이 구매했다. 그리고 집에 와서도 자꾸 보고 있다. 전시는 8월 28일까지니고, 입장권 현장 구매를 해야 한다면 조금 부지런히 9시까지는 판매처에 도착하는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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