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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블린 연구소 Aug 17. 2022

일상에 숨어 있는 두려움

넷플릭스 '1922'를 보고.

오늘도 먹을 것을 사 와서 사무실에서 혼자 점심을 먹었습니다. 자연히 넷플릭스 런치 영화관을 클릭했지요. 무심코 액정화면을 이리저리 밀어보다가 눈에 걸리는 영화가 있었는데 작품명이 ‘1922’였습니다. 제목도 불친절하고, 콘텐츠 개요 속 감독이나 출연진도 전혀 모르는 사람들뿐이었습니다. 그래도 한 번 눌러본 이유는 원작자가 ‘스티븐 킹’이었기 때문입니다.


 ‘1922년엔 남자가 가진 땅이 곧 자존심이었다.’는 윌프레드의 독백으로 영화가 시작됩니다. 그는 평생 옥수수 농사를 지으면서 가정을 일군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농부였습니다. 그렇지만 부인 알렛의 생각은 달랐지요. 그녀는 최근에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은 땅을 팔아서 도시로 이사 가고 싶다는 바람이 있습니다. 땅도 벌써 신탁회사를 통해서 내놓은 상태였구요. 그들에게는 헨리라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녀석은 이웃 농장의 섀넌과 사랑에 빠져있는 상태였습니다. 엄마가 자신의 계획을 이야기하자 아빠와 아들은 당황합니다. 두 남자는 고민을 하다가 이곳에서 계속 살려면 엄마를 살해해야만 한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다른 해결 방법이 있었겠지만, 그들 마음속에 사는 어두운 남자의 명령을 따른 것이지요.

 

 둘은 잠자는 알렛의 목을 칼로 그어서 죽입니다. 둘은 정신적으로도 힘들었겠지만, 우선은 신체적으로 힘든 노동을 해야 했습니다. 성인의 사체를 이층 침실에서 뒷마당 우물까지 들어서 옮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목의 혈관에서 분출했던 핏자국을 무릎 꿇고 박박 문질러 지워야 하는 건 덤입니다. 엄마에게서 연락이 없자 토지회사 직원과 마을 보안관도 집에 들렀다가 갑니다. 윌프레드 부자는 자연스러운 연기로 별다른 의심을 받지 않고 범죄를 숨겼습니다. 1920년도 미국 시골에 있을 법한 전형적인 이층 목조주택은 평화로워 보입니다. 계단을 오를 때마다 나무 뒤틀리는 소리로 삐걱거리고, 엄마가 앉아서 뜨개질을 하던 안락의자도 여전히 구석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아들과 아빠는 함께 저녁을 먹습니다. 엄마가 없을 뿐 모든 것은 그대로입니다. 그리고 두 남자는 바라던대로 이 집에서 계속 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과연 남은 삶을 온전하게  이어갈 수 있을까요?

 

 항상 일상의 공간이 가장 공포스러울 수 있고, 매일 마주쳐야 하는 사람이 무섭게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순간적인 판단 미숙으로 범하게 된 잘못이나 자책감은, 그 일을 떠올리게 하는 물건을 통해서 삽시간에 현실을 지옥으로 만듭니다. 작은 말다툼이 순식간에 칼부림으로 번졌다는 뉴스를 보면 새삼 몸과 마음도 움츠러들고요. 스티븐 킹의 이야기가 특별한 것은 우리의 생활 아주 가까운 곳에  도사리고 있는 두려움을 찾아낸다는 점입니다. 밝은 대낮에 비엔나 소시지가 들은 편의점 도시락을 먹으면서 영화를 보는데도 목덜미가 자꾸만 서늘해지곤 했습니다.

 

 꼭 스포일러를 하지 않더라도 두 사내의 앞 길이 순탄하지 않으리란 것은 예상할 수 있습니다. 아들 헨리는 이웃집 섀넌과 새 생명을 만들지만 불행하게 끝을 맺습니다. 적막한 이층집에 혼자 남게 된 윌프레드는 끊임없이 알렛의 환영에 시달립니다. 쥐에게 한 쪽 눈을 뜯긴 모습으로 나타난 아내는 계속해서 남편에게 속삭입니다. 시체의 핏자국은 지웠지만, 마음속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고 커져만 갑니다. 아내를 파먹었던 쥐들이 이제는 그를 향해 달려듭니다. 윌프레드는 차라리 자신을 죽여달라고 사정합니다. ‘죄짓고는 못 산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 킹의 원작을 찾아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점심때까지 여기는 수증기를 머금은 비가 많이도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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