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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블린 연구소 Oct 18. 2022

'힐빌리의 노래'를 읽고.

J. D. 밴스의 ‘힐빌리의 노래’(김보람 옮김)라는 책을 읽었다. 영어명 원제는 Hillbilly Elegy, 즉 힐빌리의 애가(슬픈 노래)였다. 책을 다 읽고 보니 단순히 ‘노래’보다는 ‘애가’라는 표현이 더 적절한 듯했다. 주된 내용이 백인 노동자들의 고단한 삶을 다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처한 문제는 우리나라 취약계층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    

 

 이야기는 오하이오주 미들타운을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한때는 철강산업이 융성해서 인파가 북적이는 활기찬 도시였다. 하지만 시대 흐름에 따라 공장들은 문을 닫고, 사람들은 일자리를 찾아 하나 둘 떠나간다. 다른 곳에서 새 삶을 꾸릴 밑천이 없는 이들은 그대로 주저앉아 궁핍한 생활을 이어 나간다. 어쩔 수 없이 남게 된 대다수 주민들은 조상때부터 날품팔이로 연명해온 백인들이었다. 그들에게 ‘가난은 가풍’이었고, 사회는 이들을 ‘힐빌리’라고 불렀다.

     

 밴스는 이 가난한 지역의 가정에서 자란다. 생물학적인 아버지와는 이별한지 오래되었고 이후에도 계속 아버지들이 바뀐다. 엄마는 어린 나이에 누나와 밴스를 출산하고 방황과 일탈을 지속한다. 어린 밴스의 손을 잡아준 것은 외할머니와 누나였다. 특히 밴스가 ‘할모’라고 부르며 따르는 외할머니는 소년의 인생에서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해준다. 할모의 희생과 보살핌으로 밴스는 오하이오 주립대를 거처 예일대 로스쿨을 졸업하게 된다. 마침내 자신을 짓누르던 가난과 혼돈에서 벗어난 저자는 이 책에서 자신의 성장기를 담담하게 들려준다.     

 밴스의 사연을 읽으면서 ‘힐빌리’라는 단어를 처음 접했다. 대대로 육체노동으로 삶을 이어온 백인 노동자 집단이 존재한다는 것은 이번에 알았다. 2016년 미국 대선 때에 트럼프 후보가 이른바 ‘러스트 벨트’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당선되었다는 기사를 여러 번 본 적이 있다. 책장을 넘기면서 쇠락한 공업지대 힐빌리들이 왜 트럼프를 찍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들의 일자리는 점점 사라져 가고, 앞으로도 삶이 나아질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기댈 곳을 잃은 노동자들이 ‘아메리카 퍼스트’를 외치는 트럼프를 선택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책을 통해서 산업의 부침과 지역의 흥망성쇠 과정도 지켜볼 수 있었다. 작가는 자신이 나고 자란 미들타운에 어떤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는지, 어떻게 성장해 나갔는지 등을 이야기한다. 그러다가 일자리가 없어지면서 사람들이 떠나고 황폐해져 가는 도시의 모습을 현실감 있게 그렸다. 공원의 테니스 코트 바닥은 갈라지고, 농구 골대도 낡았으나 더 이상 아무도 보수하거나 신경 쓰지 않았다. 경기가 좋았을 때는 자물쇠를 채우지 않고 자전거를 마당에 내놓아도 괜찮았으나, 지금은 자전거 도둑이 출몰한다. 뉴스에 나오는 거창한 통계 그래프나 교수님의 딱딱한 설명이 아닌 생활 밀접형 사례를 들어주어서 쉽게 공감할 수 있었다.   

  

 저자는 불리한 환경 속에서 이뤄낸 자신의 성공 스토리를 자랑하려고 이 책을 쓴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힐빌리들이 왜 가난할 수밖에 없는지, 빈민 지역 학생들이 왜 학업을 쉽게 포기하는지를 설명한다. 밴스는 어린 시절 동네 어른들이 적극적으로 일할 의욕이 없고, 가난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고방식을 가졌다고 언급한다. 범죄와 폭력이 일상인 환경에서 동네 친구들은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고백한다. 설명을 통해서 힐빌리 중에서 자신과 같은 사람이 나오기 힘든 이유를 밝혀낸다.


 이야기의 배경은 미국 애팔래치아산맥 부근의 오래된 공업도시다. 하지만 그곳의 사연은 우리나라에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었다. 우선은 아이들에게 가정환경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 밴스는 집에서 일어나는 부모들 간의 다툼과 이웃에서 벌어지는 폭력적인 상황이 얼마나 스트레스였는지 여러 번 이야기하고 있다.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할모 마저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두 아이의 아빠로서 아이들이 정서적으로 의지할 만한 부모였는지 읽는 내내 돌이켜보았다. 주위 가정에 힘들어 하는 아이들은 없는지 둘러보게 되고, 그들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사회적 안전망이 무엇이 있는지 살펴보게 되었다. 

    

 계층과 지역에 따른 불평등 이슈도 생각해 보는 기회였다. 오늘날 한국에서도 빈곤층의 경제 상황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부자들은 재력을 종잣돈으로 더 큰 부를 쌓고 있다. 학력의 대물림도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과거에는 학교 공부와 책만 가지고도 얼마든지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으나, 지금은 사교육의 위력을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넘어서기 힘들기 때문이다.   

  

 ‘힐빌리의 노래’에서 저자 밴스는 자기 마을 사람들이 왜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지, 왜 대학을 졸업하는 학생들이 나오기 어려운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 슬픈 노래는 비단 미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들려오고 있다. 경제 상황이 어려울수록 부자만 더욱 부자가 된다는 인식이 만연해 있고, 사회 지도층 자녀가 이른바 ‘아빠 찬스’로 명문대에 진학했다는 기사가 끊이지 않고 있다. 미래를 위해서는 국민 모두가 나라에 대한 소속감을 가지고, 공정한 기회를 부여받을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경제적으로 취약한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정책을 계속해서 고민해야 한다. 책을 덮으면서 이제는 힐빌리들의 애가(哀歌)에 우리사회도 좀 더 귀를 기울여 할 때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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