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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블린 연구소 Feb 21. 2023

2023년 경주마 번식 시즌 시작!!

아침 6시에 아파트 입구를 나서니 차갑고 습한 공기가 폐 속으로 밀려들어 왔다. 서둘러 첫 번째 번식 검사 농가를 방문했다. 오늘 교배할 씨암말 상태를 체크하기 위해서다. 자궁에 발정도 좋고, 난포도 주먹만 하게 자랐기를 기대하면서 초음파 검사를 한다. 그런데 이게 웬걸. 벌써 배란되어서 난포벽 안으로 피가 차오르는 모습이 화면에 나타난다. 실망하는 농가 사장님을 모른 척하고 다음 목장으로 이동한다. 이번에는 이틀 전에 교배했던 말인데, 배란 검사하는 날이다. 초음파 프로브가 자궁각을 지나 난소를 비추기 시작한다. 이번에야말로 선명한 황체를 기대했지만, 이번에는 5센치까지 자란 동그랗고 잘생긴 난포가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말 번식에 입문했을 때는, 한 10년 정도 하면 이 분야에 도가 틀 줄 알았다. 교배 타이밍도 정확하게 잡고, 난임으로 고생하는 씨암말들 문제도 해결해 주고 말이다. 그런데 이일을 15년 정도 하고 나서 알게 된 것은 '해도 해도 모르겠다'는 점이다. 여전히 교뱃날 아침에 배란된 씨암말 때문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다. 임신검사를 다섯 마리 하는데, 한 마리도 자궁에 태아가 보이지 않으면 갑자기 앞도 보이지 않고 현기증이 나는 증상도 똑같다. 20년을 채우면 좀 나아질까.


 계절번식을 하는 말의 번식철은 대략 2월 하순부터 6월 초까지이다. 일단 교배시즌이 시작되면 하루가 지날수록 조금씩 더 바빠진다. 목장에 갈 때마다 간밤에 태어난 망아지들이 늘어나 있다. 출산을 많이 했다는 것은 다시 새 생명을 가져야 하는 산모들과, 더불어 소아과 환자도 늘어난다는 의미다. 한창 바쁠 때는 해가 뜨기 훨씬 전부터 일을 시작해서 어두워질 때까지 꼬박 진료차 타고 돌아다니기도 한다. 집에 가서 밥 먹고 쓰러져 자다가 한밤중에 난산이나 산통 전화받고 눈보라를 해치고 산모퉁이 목장을 찾기도 한다. 뭐 거창한 사명감이나 직업적 자부심이 있는 건 아니다. 내가 가진 지식과 경험으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으니 기쁘게 일할 뿐이다.


 계속 우상향 곡선을 그리던 일의 양은 5월 5일 즈음을 변곡점으로 줄어들기 시작한다. 웬만큼 망아지들도 태어났고, 이때부터는 교배를 고민하는 농가도 많기 때문이다. 기분상인지는 몰라도 이날만 지나면 왠지 번식철 끝이 보이는 느낌이다. 여름휴가도 손에 잡힐 듯이 다가온다.


 당분간은 새벽 알람에 잠을 깨야 하고, 마음을 읽을 수 없는 사모님말들 때문에 애간장도 끓여야 한다. 설사로 탈수가 심한데도 도무지 엄마젖을 안 먹는 망아지 때문에 노심초사도 하고, 지성으로 노력해도 임신이 안되는 씨암말 때문에 끊었던 담배도 생각나고 할 것이다. 매년 언제쯤 번식철이 끝날 것인지 손꼽아 기다린다. 막상 정신없이 지내다 보면 농가에서 먼저 ‘원장님 내일은 어린이날인데 오전 진료만 하셔야죠?’라고 묻는 날이 금방 온다. 2023년 제주도 경주마 번식 시즌이 막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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