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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블린 연구소 Jun 14. 2023

오랜만에 들어가 본 수술실.

필드 수의사의 본격 수술방 체험기

 오랜만에 수술에 참여했다. 의뢰보낸 말들 수술하는 모습을 참관하는 경우는 가끔 있지만, 본격적으로 손소독하고, 수술복 입고, 멸균 장갑 끼고 수술대에 서게 되는 일은 거의 없다. 이번에는 주말에 갑자기 수술을 하게 된 터라 인원이 부족했다. 태어난 지 두 달 된 망아지가 오줌을 싸지 못해서 병원에 실려 온 케이스였다. 초음파로 보았더니, 하얀 무언가가 요도를 꽉 막고 있었다. 집도 선생님, 마취 선생님은 계시고 딱 어시스트할 사람이 없었기에 내가 하기로 했다. 뭐 대단한 일을 하는 건 아니고 수술 부위 벌리고 있고, 혈액을 비롯한 각종 삼출물을 닦아내거나 흡입하고, 서전이 필요한 것 눈치껏 전해드리는 등 보조적인 역할을 하면 되었다. 솔직히 나는 망아지 상태만 잠깐 보고 퇴근해서 주말 저녁을 보낼 심산이었다. 졸지에 토요일 오후 6시에 손톱사이를 베타딘 스크럽으로 박박 문대고 있으려니 콧노래가 절로 흘러나왔다.


 멸균복장으로 수술실에 들어섰다. 수술과 마취시간을 알리는 대형 전자시계가 한쪽 벽면에서 깜빡이고 있었고, 다른 쪽에는 바이탈 사인을 표시하는 대형 스크린 붙어있었다. 서늘한 수술장의 온도, 근원을 특정할 수 없는 냄새, 정체 모를 각종 알림음들이 나를 감쌌다. 크레인에 들려서 수술대로 옮겨진 망아지는 네 다리를 천정으로 향하고 누워 있었다. 그 사이를 수술을 준비하는 테크니션 선생님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층층시하 종갓집 부엌에 처음으로 들어온 새며느리처럼 나는 모든 게 불안하고 어색했다. 수술실에는 지켜야 할 룰이 많은데, 대부분은 멸균 aseptic 상태를 유지하려는 노력이다. 누군가와 부딪혀서는 안되고, 쓸데없는 곳을 만져서는 더더욱 안된다. 수술방에 자주 들어왔던 사람들은 그런 규칙이 몸에 배어있어서 자연스럽게 행동할 수 있었으나, 나의 머릿속에는 실수하지 말아야 할 텐데 하는 걱정만 가득했다.


 나에게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시어머니의 헛기침이나 손위 동서의 곁눈질도 없었으나, 나는 손끝을 소심하게 가슴높이로 올리고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서 있었다. 이때 나의 심정을 꿰뚫어본 테크니션 선생님이 “원장님 장갑 끼셨으니 이것 좀 해주세요.” 하면서 이것저것 하기 쉬운 일들을 지정해 주니 한결 운신이 편했다. 덩치도 커다란 사람이 수술복 차림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으니 얼마나 안돼 보였을까.


 그렇게 수술이 시작되었다.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막상 수술에 직접 참여해 보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는지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보조적인 역할을 했을 뿐인데도 수술 후에 다리, 허리 모두 아팠다. 긴장해서인지 평소보다 더 많이 피곤했다. 내가 이 정도이니 집도하시는 선생님은 훨씬 고되셨을 것이다. 마취선생님은 허약한 망아지에게 마취를 물려놓고 내내 노심초사하고 계셨다. 테크니션 선생님들도 원활한 진행을 위해서 잠시도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요도를 열어보니 손가락 한마디 만큼한 결석이 구슬처럼 박혀 있었다. 톡하고 떼어내니 속이 다 후련했다.


 나는 어쩌다 한번 참여했지만, 이런 수술을 일주일에 몇 번씩이나 한다니 수술병원 선생님들이 존경스러웠다. 수술하는 과정에 정말 많은 정신적, 육체적 에너지가 소모된다. 수술 후에 정리하고, 다음 수술을 준비하는 과정에도 여러 스탭들의 땀과 정성이 필요하다. 진심으로 좋아하지 않으면 못하는 일들이다. 게다가 이분들 모두 근무하는 날이 아닌데도 응급마 내원으로 병원에 모인 것이다. 그나마 토요일 오후면 비교적 양호한 타이밍이다. 응급 전화벨은 일요일 깊은 밤에도, 추석연휴에도, 모처럼 가족들과 호캉스 체크인을 하는 중간에도, 영화 보며 먹을 팝콘을 고르는 와중에도 울린다. 아무런 자비심이 없다. 물론 직업에 따르는 책임과 윤리가 있다. 하지만 때로는 그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궁금하다. 인생은 짧은데.


 오랜만에 수술방에 들어가서 손을 보태면서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여기 쓴 것보다 더 많은 일들이 떠올랐던 것 같은데, 다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가장 주된 생각은 이차병원 선생님들에게 더욱 감사하고, 내가 야전에서 막을 수 있는 건 최대한 내선에서 해결해야겠다는 다짐이었다. 마취에서 깬 망아지가 시원하게 방광을 비웠다. 힘들지만 역시 보람 있는 직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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