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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은 바꿀 수 있어도, 응원팀은 바꿀 수 없다.

청룡시절부터 엘지 트윈스 팬

by 고블린 연구소


서울에서 나고 자랐다. 엘지와 두산 모두 서울 연고 팀이지만 체감하기에는 두산 팬이 (훨씬) 많은 것 같았다. 그렇지만 나는 초등학교 때 MBC 청룡 시절부터 엘지 트윈스를 응원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잘 생각나지 않는다. 사돈에 팔촌까지 넓혀봐도 MBC나 엘지와는 전혀 연이 닿아 있지 않다.


두산은 늘 우승을 차지하거나 정상을 위협하는 강팀이었다. 그에 비하면 엘지는 약체로 평가받거나 잘 봐줘야 중간 정도의 전력이었다. 흔히 트윈스를 소총부대 신바람 야구라고 하는데 이건 듣기 좋게 하는 말이고, 쉽게 말해서 한 방을 날려줄 거포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주위 친구들로부터 두산으로 응원팀을 바꾸라고 많은 협박과 회유 및 조롱이 있었다. 하지만 여럿이 잠실야구장에 가서 혼자만 엘지를 외칠지언정 응원팀을 바꿀 수는 없었다. 호적에 엘지팬이라고 굵은 글씨로 쓰여 있는 것도 아니고, 두산 응원하기로 마음 바꾸었다고 벌금을 내는 것도 아닌데, 난 굳이 고된 약팀인 엘지에게 끌렸다. 내가 생각하는 드라마 스토브리그 최고 명대사 “국적은 바꿀 수 있어도, 응원팀은 바꿀 수 없다.”말을 들었을 때 내 이야기를 하는 줄 알았다.


이번 두산과의 준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2루에 있던 포수 유강남이 짧은 중견수 앞 안타에 홈까지 쇄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솔직히 감동했다. 빠르지 않은 유강남이 저런 주루 플레이를 보여주다니. 비디오 판독을 통해 다행히 세이프 판정을 받았지만, 아웃되었더라도 그를 원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열심히 하는 모습만 보여준다면, 몸을 아끼지 않는 허슬플레이로 가슴을 뛰게 해준다면 결과와 상관없이 팬으로서 만족이다. 쨉만으로도 상대방을 쓰러뜨릴 수 있다는 걸 증명하듯이 기억에 남는 장타 하나 없이 준플레이오프 2차전을 잡아냈다. 그때만 해도 올해는 정말 오랜만에 포스트시즌에서 두산을 넘어서는가 싶었다.


준플레이오프 시리즈 동점을 이루고 3차전을 내내 기다렸다. 야구는 흔히 투수놀음이라고 하는데, 두산은 1, 2 선발인 외국인 투수가 모두 빠졌고, 나머지 계투진도 와일드카드전을 치르고 올라와서 지쳐 있었다. 식물타선이라고 놀림받던 타선도 2차전에 폭발하는 모습을 보여서 상대방의 낮아진 마운드를 충분히 털어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대포가 아닌 소총이면 어떠냐. 그거라도 많이만 터저다오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결과는 7점차 대패였다. 이대로 가을야구가 끝인 것이 아쉬웠고, 상대가 하필 또 두산이어서 더욱 우울했다. 왜 두산 앞에서는 이리도 작아지는가. 정말 실망이었다.


그래도 나는 안다. 원망하면서도 엘지 트윈스를 버리지 못할 거고, 어차피 죽을 때까지 유광잠바를 입게 될 운명이란 것을 말이다. 다시는 야구 안 본다고 리모콘 집어던져 놓고는, 내년 봄이 되면 다시 TV 앞에 앉아서 노심초사하면서 엘지를 응원하게 될 내 모습이 떠오른다. 올해 좋은 신인들을 여럿 발굴했고, 마운드는 더욱 단단해졌다. 올해 한국시리스도 끝났고 내년에는 정말로 해볼 만하다. 또 이런 기대를 하고 있는 나를 보며 측은해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상관없다. 실망은 일주일정도면 충분하고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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