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말들 백신 접종하는 날이다. 그동안 넓은 방목지에 풀려 있어서 얼굴 보기도 힘들었던 녀석들이 좁은 패독에 모여있다. 별안간 주사를 맞게 된 비운의 주인공은 이 목장의 더러브렛 1세마 20마리다. 이맘때 1세마들은 대략 400킬로그램에서 450킬로그램 정도로 거의 성마에 가깝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동물도 따끔한 주사를 좋아할 리 없다. 더군다나 녀석들은 잘 발달된 말근육으로 뭉쳐진 괴력의 소유자들이다. 말과 사람 모두 위험한 상황이 올 수도 있으니 긴장해야 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말도 예방 주사를 맞는다. 일년에 두차례 4월~5월 사이에 한번, 10월에서 11월 사이에 또 한번 실시한다. 봄에는 말인플루엔자와 일본뇌염, 가을에는 말인플루엔자와 선역/파상풍 백신을 접종한다. 비용은 농림축산식품부와 한국마사회에서 지원한다. 꼭 경주마가 아니어도 마사회에 등록된 마필이면 모두 사업대상이기 때문에 많은 말들이 무료로 병원균에 대한 항체가를 끌어올릴 수 있다. 그래서 접종 기간은 방문할 기회가 적었던 소규모 농가나 취미로 말을 기르시는 분들을 오랜만에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봄에 접종할 때는 번식검사 시기와 겹쳐서 백신업무를 끝마치기도 힘겹다. 급하게 차를 몰아 목장 마당까지 돌진해서 차를 세우고 마체 확인하고, 접종하고, 다시 물건 챙겨 진료차에 오르기 바쁘다. 어떤 목장장님 말에 따르면 내 차가 들어오는 기세만 보아도 오늘 원장님이 얼마나 시간에 쫓기는지 짐작이 된다고 했다. 교배업무가 가득한 봄철에는 정말 어쩔 수 없다. 흐트러지게 날리는 벚꽃 사이로 진료 전화가 불이 나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서 가을에 백신사업을 할 때는 상대적으로 시간 여유가 있다. 오랜만에 목장도 한 바퀴 둘러보고, 목장 사장님하고 묵혀두었던 이야기도 나눌 수 있다. 새로운 말 식구가 늘어나 있기도 하고, 마사를 신축해서 멋진 건물이 들어서 있는 경우도 있다. 안타까울 때도 있다. 개업 초기 서투른 수의사의 실수를 애써 모른척해 주시던 어르신을 더 이상 뵙지 못할 때이다. 그 삼촌이 아닌 아들이 끌고 들어오는 말을 보면서 그만큼 내 눈가의 주름도 늘어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주위를 둘러보면, 말목장의 가을이 너무나 아름답게 익어가고 있었다. 내가 분명히 서귀포 감귤집 사위임을 몇 번 밝혔음에도 일이 끝나고 목장을 나설 때는 양손 가득히 귤 보따리가 들려 있을 때도 많다.
주사를 놓으면서 마명을 확인하다 보면 긴 시간만에 만나는 반가운 말도 있다. 직업이 수의사다보니 기억에 남아있는 말들은 주로 어렸을 때 아프거나 문제가 있었던 말들이다. 난산이 걸려서 새벽 두시에 전화받고 눈보라를 해치고 달려가서 다리를 잡아끌었던 말도 있고, 지세(다리모양)가 고르지 못해서 태어난지 두 달 된 걸 수술하고 교정편자를 신겨주었던 망아지도 있다. 폐렴 때문에 체온이 안 떨어져서 며칠을 고생시킨 말도 있다. 당시에는 모두 어리고 연약해서 나와 목장 사람들을 노심초사하게 만들었던 아기들이었다. 이제는 건장한 청년의 모습으로 내 앞에 우뚝 서 있는 걸 볼 때마다 만감이 교차한다. 그럴 때는 나도 모르게 ‘잘 있었어’라고 말이 튀어나온다.
평화롭고 목가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았지만 접종 현장은 절대 만만치 않다. 말이 돌발적으로 움직일 수 있으므로 사고의 가능성이 항상 함께 한다. 그리고 말 역시 드물지만 백신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 그러므로 주사 전에 마체를 유심히 관찰하려고 한다. 신체 건강한 말이라도 백신을 맞아서 병원균에 대한 저항성을 기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심호흡 한 번하고 아이스박스에 가득 쟁여온 백신을 들고 녀석들 틈으로 들어간다. 오늘 분위기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녀석들이 벌써부터 콧바람을 불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