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킹 아저씨의 소설 ‘홀리’.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여러 번 밝혔지만 킹의 소설은 지루하거나 기괴하기만 한 작품도 다수 있다. 하지만 나와 주파수가 맞는 이야기가 걸리면 600페이지 벽돌을 하루 만에 격파하게 만든다. 이 책이 그랬다.
주인공은 홀리 기브니라는 아줌마. 벽에 걸린 액자가 조금이라도 비뚤어져 있으면 참지 못하고, 금고 다이얼은 항상 0에다 맞춰둬야 한다. 타인과 대면할 때는 마스크와 백신접종여부도 꼼꼼하게 체크한다. (코로나 시국이 배경이다.) 피지컬로는 동네 초등학생들에게도 밀릴만하지만, 꼼꼼한 눈매와 중년 여자만이 지닐 수 있는 통찰력으로 연쇄살인범을 추적한다.
범인은 은퇴한 대학교수 부부다. 악당의 정체가 이야기 극 초반에 공개되므로 전혀 스포일러가 아니다. 이들은 노인이라는 점, 그리고 교수라는 신분을 범죄에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지나가는 젊은이나 아이들에게 휠체어를 승합차까지만 밀어달라면서 유인한다. 이 장면에서 극한의 위험이 일상 아주 가까이에 도사리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잊고 있었던 어린 시절 사건도 떠올랐다.
1.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까지 내 우주의 중심부는 휘경역(하도 오랜만이어서 검색해 보니 벌써 오래전에 외대앞역으로 역명이 변경되어 있었음.)에서 외대 정문까지 이어지는 대략 1킬로 정도의 대로였다. 그 거리는 역 주변 유동인구뿐만 아니라, 외대 다니는 형 누나들 때문에 항상 활기가 넘쳤다. 우리 옆집에도 서울로 유학 온 아랍어과 누나가 살았다. 그 누나를 오랫동안 잊을 수 없었다. ‘아랍’이라는 단어가 강렬했을 뿐만 아니라, 결정적으로 10살 소년이 보기에 누나가 너무나 이뻤기 때문이다. 그때는 누나하고 눈만 마주치면 왜 그렇게 부끄러웠는지 이유를 몰랐는데, 뒤돌아 생각해 보니 누나는 전형적인 고양이 눈매를 가지고 있었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어쩌면 당시에도 이름은 몰랐을 수 있다.) 갈색 뿔테안경, 연두색 치마반바지, 손목 안쪽으로 보이게 찬 작은 직사각형 모양 시계가 떠오른다. (꼬마가 보기에도 그 시계가 참 멋스럽다고 느꼈는데, 어른이 돼서 알고 보니 까르띠에 탱크솔로 모델이었다.) 어쩌다 마주치면 누나는 동네 어귀 슈퍼에서 자갈치나 벌집핏자등을 사주었다. 누나도 넉넉치 않은 지방 유학생이었을 텐데.
당시 대학가 주변 마을의 최대 애로사항은 수시로 최루탄을 경험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데모는 외대정문쪽에서 했겠지만, 매운 가루는 당연히 우리 동네에도 날아들었다.
“밥 먹고 이따가 데모 구경 하러 갈려고.”
자갈치 봉지를 뜯고 있는데, 누나가 이야기했다. 당연히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 고통스러운 장소를 일부러 찾아 간다니.
“눈하고 코 맵지 않아요?”
“마스크 쓰면 괜찮아.”
나는 속으로 미래소년 코난에서 봤던 눈과 코를 포함해서 얼굴 전체를 가리는 방독면(물론 당시에는 방독면이라는 단어 자체를 몰랐지만)을 떠올렸다.
“누나 집에 그런 게 있어요?”
“응. 있어.” 누나가 하얀 땡땡이가 박힌 코발트색 머플러를 고쳐메면서 대답했다.
“그럼 다음에 또 보자. 넌 오늘 집에 있어라.” 누나같이 이쁜 여자가 검은색 마스크를 뒤집어쓰고 데모 현장에 간다니 상상이 잘 안되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2.
그 동네를 묘사해 보려고 해도 이제는 조각조각만 떠오른다. 그 가운데 선명하게 머릿속에 남아있는 점포들도 몇 개 있다. 당시 국민학생들의 영원한 숙제 도우미 동아전과를 팔던 서점이 있었고, 약을 강하게 써서 감기가 금방 떨어진다는 알파 약국도 있었다. (그래서 엄마는 조금 멀어도 꼭 거기서 약을 지어오라고 하셨다.) 어린애가 보기에도 목 좋은 곳에는 안경점이나 빵집이 들어서 있었고, 약간 후미진 곳에는 헌책방이나 문방구가 자리하고 있었다. 가게들 사이 빈 공간에는 근처 극장에서 개봉 중인 영화 포스터가 붙어 있었는데, (가끔 로보캅이나 람보도 있었지만,) 주로 속살이 하얗게 비치는 한복을 입은 여자들이 애매한 포즈로 누워있고는 했었다. 그 옆으로 험악한 표정의 지명수배범이나 가로 줄무늬 티셔츠를 입은 실종 어린이 전단도 기억난다. 그 아이들이 내 또래라는 걸 보면서 내가 아니라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 발걸음을 항상 블랙홀처럼 빨아들인 건 외대 정문 앞 외대오락실이었다. 한 판에 오십원 하던 시절이었다.
승진이는 같은 동네 살던 친구였다. 단칸방에서 살던 우리집과는 달리 승진이네는 엄연히 벽돌 담벼락이 있고 그 안에 마당과 널찍한 목재 마루가 펼쳐진 집에 살았다. 걔네 집에 처음 갔을 때 대문 앞에 붙어있던 길다란 종이를 잊을 수 없다. 거기에는 <oo일보 사절>이라고 쓰여있었다. 당시 나는 사절의 의미를 ‘외국에 나가서 국가를 대표하는 높은 관리’라고만 알고 있었다. 붉은색 담장과 고위 공무원이라니. 내색하진 않았지만 승진이네는 정말 부자구나라고 생각했었다.
“너 일기장 때문에 아빠한테 맞아죽을 뻔했다.” 여름방학이 끝나갈 때쯤 내 일기장을 빌려 갔던 승진이가 말했다. 사연은 이러했다. 어쩌다 수중에 동전이라도 생기면 우리는 곧바로 오락실로 달려가고는 했다. 하지만 주머니는 금방 먼지만 날리게 되고, 그때부터는 남들 오락하는 걸 구경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승진이는 가방에서 플라스틱 빨대를 꺼냈다. 빨대 끝을 접어서 갈고리처럼 만들고, 오락기의 동전 반환 구멍에 넣어서 쑤시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효과가 있었다. 지금도 그 순간 ‘띠링’하던 동전투입 효과음이 선명하게 귓가에 울린다. 하루가 일 년 같던 코흘리개 시절에 그 일은 당연히 무지하게 인상적이었고, 난 그 사건을 일기장에 쓸 수밖에 없었다. ‘나는 오늘 외대오락실에서 승진이가 쑤시는 걸 보았다....’라고 시작되는데, 하필 그날 일기를 승진이 아버지가 읽은 모양이었다.
3.
오락 구경을 지겹도록 한 다음에 나와 승진이는 오락실을 나왔다. 해가 저물 무렵이라 집으로 가는 길에 간판 불이 들어온 곳도 있었고, 그대로인 가게도 있었다. 그때쯤 한 할머니가 우리를 막아섰다. 인상착의는 기억나지 않지만, 할머니 앞에는 눈사람 몸통만 한 보따리가 두 덩이 놓여있었다.
“학생들 이것 좀 여기 지하까지 들어줄래?”
우리가 매일 책가방을 매고 드나들던 길가 건물이었다. 그렇지만 들어가 본 적은 없었고, 지하는 더더욱 모르는 곳이었다. 하지만 당시는 ‘어른 공경’을 최고의 미덕으로 교육하던 시절이었다. 우리는 뭐 그리 착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내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살피고 있는 사이에, 승진이는 어느새 보따리를 하나 들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나도 어쩔 수 없이 주황색 보자기로 싼 짐을 들었다. 그 짧은 순간 나는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보따리가 크기에 비해서 너무 가벼웠기 때문이다. 이 정도라면 할머니도 충분히 들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할머니가 어느새 내 등 뒤에 바짝 붙어섰기 때문에 돌아설 수는 없었다. 나도 승진이를 따라서 지하계단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승진이는 갑자기 자기 보따리를 옆에 놓더니 뒤돌아 뛰어나가버렸다. 순식간이라 할머니도 승진이를 미처 저지하지 못했다. 혼자 남겨진 나는 수만 갈레의 상상을 했지만 실행에 옮길 수는 없었다. 할머니의 시선이 내 등어리에만 집중되어 있으므로 나는 도망도 못 가고 계단 중간참까지 내려섰다. 이제 반대로 방향을 틀어서 몇 계단만 더 내려가면 지하층 입구에 이를 터였다. 지하실 문이 보였다.
테두리는 갈색으로 변색된 철재였고, 그 사이는 짙은 파란색으로 코팅된 유리가 붙어 있었다. 3분의 1쯤 문이 열려있었는데, 그 사이로 불을 켠 건지 어떤 건지 모를 희미한 불빛만 흘러나오고 있었다. 내 뒤로 들리던 대학가의 웅성거림도 이제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때라도 보따리를 두고 뒤돌아 나가고 싶었으나 할머니의 콧숨이 바로 목뒤로 불어왔다. 계단 중간에서 멈춰 서서 망설였다. 실제로는 불과 몇 초였을 테지만, 내가 느끼기에는 한 시간 같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 할머니가 내 옆으로 다가서는 기척이 느껴졌다. 바로 그때 너무나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병윤아 어디 가? 집에 가야지. 빨리 나와.” 뒤돌아섰더니 할머니 파마머리 뒤로 아랍어과 누나의 연두색 치마반바지가 보였다. 순했던 나는 그때도 망설였던 것 같다. 그랬더니 누나가 다시 한번 나를 불렀다.
“늦었어. 빨리 와.” 나는 두말하지 않고 목소리를 향해서 계단을 올랐다. 당시 할머니가 나를 제지했었는지, 할머니에게 뭐라 말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착했던 나는 그 와중에도 아마 할머니에게 죄송하다고 했겠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건 그때 본 뿔테안경 뒤 누나의 이쁜 얼굴이었다. 그 계단을 마저 다 내려갔더라면, 누나가 나를 구해주지 않았다면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할머니가 정말 나쁜 의도가 있었는지, 아니면 그저 정말로 도움이 필요한 노약자였는지는 지금도 모른다. 책을 읽으면서 그날 일이 계속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