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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목 Jul 20. 2018

생각이 얼음물에 빠진 것처럼

스마트폰이나 키보드로 쓰는걸 싫어하게 된 이유는 생각을 느리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산문이나 에세이를 읽다보면 작가의 속도를 느끼는 경우가 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으나) 내가본 좋은 글들은 상당수 글을 느리게 읽어야 맛이 산다. 그 느낌이 좋아서 느리게 읽고 쓰는걸 선호하게 됐다. 느리면 생각도 정렬되고 차분해 진다. 어떻게 글을 쓸지 언제나 골몰하지만 빠르게 키보드를 타닥타닥 두들기다보면 생각의 속도만큼 쓰는 글이 빠르니 다음 생각이 날 때 까지 손가락은 초조해 진다. 눈은 썼던 글을 다시 반복해서 읽는다. 앞의 문장을 읽는 순간 생각은 흐트러진다. 쓰는 상황 자체에 집중했던 것이 일순간 무너지기 때문이다. 차분하게 하나씩 단어에 집중하니 쓸 이야기들이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하나씩 자기 자리를 찾아가서 눕는다. 그런 이유로 느리고 천천히 글을 쓴다. 손으로 글을 쓸 때는 느리게 쓰는 것이 단지 손으로 글을 쓰기 때문에 시간이 걸려서 늦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이것이 일종의 리미트로 작용해 이 속도 이상으로는 쓸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지자 생각도 함께 느려지게 되는 것이다. 생각이 빨라지면 그만큼 복잡해지고 데이터량도 많아져서 내가 뭘 얘기하려는 것인지 중간에 길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느리게 쓰면 문장 사이의 논리력도 좋아지고 연결도 한층 매끄러워진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다. 북트 홈페이지에 공지를 올리는데 PC에서 키보드로 느리게 써보니 글을 쓰는 과정에서 다음 쓸 말과 할 이야기들이 조금씩 구체화 되면서 어느새 긴 글이 되어 있었다. 공지를 그렇게 길게 써본 적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어디서든 느리게 쓰는 것을 생활화 하기 시작했다. 이 글도 스마트폰에서 아주 느리게 쓰고 있지만 전체를 다 쓴 시간은 15분 정도이다. 생각이 얼음물에 빠진 것처럼 느리게 생각을 하게 된다면 어디에 어떻게 써도 이제는 문제가 없을 것 같다. 생각이 손 끝에서 나오도록 천천히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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