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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목 Jun 10. 2019

생존 글쓰기

어느 날 문득, 글을 쓰게 되었다. 누군가 말해준 것도, 권유를 받은 것도 아니었고 나는 스스로 언제나 그래 왔듯 아무렇지도 않게 혼자 글쓰기를 하고 싶어서 노트를 샀다. 몇 줄 쓰다가 말았다. 컴퓨터에 글을 적었지만 뭘 써야 할지도 몰랐다. 머릿속에 드는 생각이 정리됐으면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때는 사업을 시작하고 회사를 운영하면서 머릿속이 터져나갈 듯이 복잡했다. 눈을 감으면 엉킨 실뭉치가 가득 차 있는 느낌이 들었다. 어디서부터 무엇을 정리해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예전의 나였다면 엉킨 줄은 잘랐을 것이다. 잘린 줄은 버리고 새롭게 쌓아 올리는 것이 나의 오래된 방법이었다. 생각하는 것은 귀찮고 어려운 일이므로 실타래를 풀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잘라내고 새롭게 시작하려 해도 실타래는 늘 엉켰다. 어디서부터 인지도 모르게 실뭉치는 꼬였고, 그것을 매번 잘라낼 수는 없었다. 어느 날부터는 꼬인 실타래를 따라서 하나하나 노트에 적어보았다. 붕 떠있는 수만 개의 생각 조각 중에서 어떻게 간신히 생각 하나를 잡아 그것을 따라가 본 것이다. 노트에 글을 쓴 것도 아니고 생각과 연계된 것들이 기억나고 느껴지는 대로 이 쪽에 조금, 저 쪽에 조금 노트에 적으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글을 쓰려고 산 노트는 어느새 생각을 뭉텅이로 적어두는 공간이 되었다. 이렇다 할 정리를 한 것은 아니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만 일단 한 마리씩 잡아서 노트에 붙이기 시작했다. 머릿속을 떠다니던 오만가지 생각들 중 몇 가지가 채집되었다. 채집된 그것을 노트에 적으며 집요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주된 내용은 대체로 일에 관련된 것들이었고 시간에 관련된 것들이었고 가정에 관련된 것들이었다. 삶을 관통하며 드러나는 사건과 문제들을 어떻게 제대로 해결하고 결정할 수 있는지 고민하는 것이었다. 나보다도 더 큰 과도한 일들이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사업의 사이즈가 조금만 커져도 어느 순간부터는 하루 종일 결정만 해도 모자를 지경이 된다. 이건 이렇게, 저건 저렇게 하라고 지시를 내려야 하는데 내 결정의 대부분은 즉흥적이었다. 이유와 원리가 없이 그야말로 즉흥. 삶이나 사업의 가치관이나 비전에 의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땐 이런 이유로 저땐 저런 이유로 아무렇게나 고심한 흔적 없이 결정하는 것이다. 내면이 몹시 시끄러웠다. 제대로 된 결정이 아니라는 느낌은 언제나 들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결할 수는 없었고 방법도 몰랐다. 시간이 지날수록 모든 결정들이 다시 나에게로 돌아와 너의 결정이 제대로 작동이 되지 않는다고 하소연했다.


더 복잡해진 마음은 수백 개의 주제들로 파편화되었지만 어떻게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입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건 이렇게 해서 이런 결정을 내려야 하는구나. 그러려면 무엇이 필요하지? 이런 것들이 필요하구나'와 같은 논리 구조가 조금씩 생성되기 시작했다. 사소한 것부터 시작해서 내 마음을 괴롭히는 오만가지 주제들에 대해서 닥치는 대로 끄적이기 시작했다. 노트는 곧 낙서 천지가 됐고, 낙서를 들여다보면 나도 몰랐던 내 머릿속 구조가 조금씩 파악되기 시작했다. 조금이나마 논리적인 면모를 갖춰가기 시작하자 이미지화 하기 시작했다. 도형과 수식이 들어가기 시작했고 글과 생각, 주제에 관련된 나의 입장을 적어보기 시작했다. 주제 하나에 대해서 생각하고 쓰고 생각하고 쓰고 그림으로 그려보는 방법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안 되면 기간을 두고 여러 번 시도했다. 되면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노트를 하기 시작하면서 안 되던 것들이 나중에는 정리되기 시작했다. 보다 구체적이고 내면적인 정리가 시작됐다. 그렇게 한 번에 하나씩 하던 정리가 1, 2년이 지나고 나니 많이 해결돼 있었다. 그래서 짧은 단편의 생각들을 글로 쓰기 시작했다. 아무렇게나 끄적이던 것과는 달리 문장을 만들었다. 글로 생각을 적던 첫날 한 문단 밖에는 쓸 수 없었다. 생각을 끄적이며 연결하는 것보다 문장을 만들어 쓰는 것이 백배는 더 어려웠다. 그리고 그걸 집요하게 계속했다. 문장을 멋지게 만들 생각은 없었다. 생각을 정리할 수만 있으면 되었다. 그렇게 글을 쓰기 시작하자 곧 여러 문단의 생각을 만들게 되었고 그게 지금에 이르렀다.


글쓰기는 어느 순간 일상이 되었고, 생각이 나면 글로 써야만 했다. 힘든 내면을 글로 쓰면서 정리가 많이 됐다. 그게 기록이 되었다. 덕분에 감정적으로 소모되지 않았고 생각이 빠르게 정리되면서 단순하고 명료한 방향을 갖게 되었다. 글쓰기를 하려고 노력한 것이 아니라, 생각을 정리하지 않으면 이대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본능적인 생존 욕구가 발동된 것이 지금에 이르렀다. 나에게 글쓰기란 이런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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