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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목 Dec 20. 2015

이해해 줄 친구 구함.

내가 그렇다는 게 아니라..

생각을 담아두면 병이 된다. 할 말은 해야 하는 법인데, 그럴 형편들이 아니다. 아니, 들어줄 사람들이 있다 하더라도, 그들이 내 얘기를 들어줄 형편이 되지 못한다. 지금 처한 난처한 상황들을 이야기로 풀어버리면 너무 많은 양의 이야기에 상대방은 맥을 못 추게 될 것이고 나 또한 상대가 감당하기 힘든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주리라 생각하기가 어렵다. 자연히 입을 다물게 된다. 


이것 봐라. 악순환의 시작이다. 용기를 내어 누군가에게 요청을 하여 내 말 좀 들어주십사 하려면 지금 시대에는 일단 돈을 들고 상담사를 찾아가는 수 밖에는 없다. 요즘 시대에 딱히 해방구가 없는 것인가. 들어줄 친구가 없는 것인가. 10년 전, 20년 전의 친하다는 친구들의 속성과 지금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미주알고주알 얘기를 해대며 서로에 대해서 가족보다 더 친한 존재가 친구였다. 그 대상이 당연히 가족이면 더 좋겠지만, 가족끼리의  언어폭력은 친구들을 찾게 만든다. "등신,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뭔 개소리를 지껄여." 한국 가정에서의 가장 큰 문제는 서로를 존중하는 경우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우리 부모들은 일방적으로 강요를 일삼거나 아니면 우리를 헤아릴 줄 몰랐다. 상처받은 영혼들은 가족에게  위로받지 못한 채 입을 다물게 된다.

 

덕분에 우리는 친구(대화를 들어줄 수 있는 그 누군가)를 잃었다. 그러면서 나 스스로도 잃어버리게 되었다. 할 말을 잃었고 SNS처럼 가볍고 느슨한 관계를 얻게 되었다. 그러니 우리는 사소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좋아요 따위를 얻어먹는 지경이 된 것이다. 골방에 앉아 혼맥을 한다거나 집에서 쓸쓸히 계란 프라이에 햇반을 차려 먹는 사랑받지 못하는 자괴감에 휩싸이기도 하고 자신의 심경을 알다가도 모를 정도로 우울한 증상을 겪기도 한다. 이게 다 들어줄 사람이 없는 건전치 못한 관계 때문에 비롯된다. 


사회가 건강한 것은 가정과 사회성의 네트워크가 튼튼할 때부터 시작한다. 대나무 숲에 소리를 질렀는데 돌아오는 메아리 역시 내 목소리라면 이는 스스로를 회복시키거나 긍정적인 피드백이 아니다. 만나면 즐거운 사람, 이야기를 들어주며 공감해주는 쿵짝이 잘 맞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이런 아무것도 아닌 만날 수 있는 존재 만으로도 상대방에게 힐링이 될 수 있는 병든 사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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