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이거 먹으러 상도동에서 왔어요." 하지만 지헌은 경양식 돈가스를 두 조각이나 남겼다. 우리는 집채만 한 돈가스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던 것이다. 처음의 호기로움은 어디로 갔나. 돈가스에 내 비빔밥도 덜어 먹었으니 분명 양이 많았을 거다. (물론 나도 돈가스 냠냠 뺏어 먹었다.) 지헌은 드럼 교재를 만들고 콘텐츠를 제작해 유료로 판매하는 일을 하고 있다. 이제 막 한 살 된 아이도 집에서 돌보고 있고 주부도 하면서 대학원 공부도 하고 있다. 심지어 논문 준비까지 하는 중인데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한 살 된 아이를 돌보고 있다는 점이다. 아이를 키워본 경험이 있다면 한 살 된 아이의 끼니를 챙겨주고 함께 놀아주고 양육에 온전히 시간을 쏟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알 것이다.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 어떤 상상으로도 상상할 수 없다. 나도 집에서 주부를 하고 있고 아이를 케어하는 중이지만 초등학교 6학년 남자아이는 혼자 잘 논다. 그사이 나는 탱자탱자 놀러 다니느라 바쁜데, 이제 한 살 된 아이라니.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는 돈 버는 이야기에 집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둘 다 직장에 다니지도 않고 자신만의 콘텐츠를 가지고 사람들을 가르쳐 수익을 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콘텐츠 제작 자영업자다. 지헌이는 드럼을, 나는 통기타에 대한 콘텐츠를 만든다. 우리는 세스 고딘 교에 빠져 만나는 사람마다 세스 고딘의 '마케팅이다' 책을 읽으라고 전도를 하고 있다. 지헌이도 전도 당해 열심히 읽고 그것을 사업으로 녹여내려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제대로 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커뮤니티를 구축하고 그들을 섬기는 일이다. 이것은 돈을 쏟아부어도 만들기 어렵고 의도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어려운 것도 아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존중해주고 좋은 매너와 성실함으로 사람들과 함께 소통할만한 이야기를 생산해 내면 된다. 사람들은 이 콘텐츠를 보면서 정을 붙인다. 그렇게 접점이 하나씩 생기는 것이고 이 커뮤니케이션이 반복되면서 사람이 모이기 시작한다. 이게 커뮤니티다.
그러면 여기 모인 사람들은 어떨까. 제공된 콘텐츠를 소비하면서 자신과 공통된 무언가를 느낄 것이다. 그러면서 정보와 인간미가 있는 곳에 서서히 정착하게 된다. 결국 커뮤니케이션은 마음이 정착할 곳을 마련해 주는 활동이며 콘텐츠를 제공한다는 것은 그들의 마음을 사는 일이다. 내가 할 줄 아는 걸 만들어서 올리는 게 과거의 콘텐츠였다면 지금은 아니다. 사람들을 섬긴다는 본질적인 의도 위에 콘텐츠가 켜켜이 쌓여야 한다. 진심이 묻어있는 콘텐츠와 조회수를 모으려는 콘텐츠는 결이 다르다. 사람들은 다 안다. 첫 화면 넘기면서부터 이게 약을 파는 건지 아니면 무언가 나에게 도움이 될만하면서도 유익할지 말이다. 그러니 지헌이나 나 같은 사람은 가르치는 콘텐츠 하나하나에 전심전력을 기울인다. 교육이다 보니 콘텐츠의 질 자체가 경쟁력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콘텐츠가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야 한다. 질문을 던지라는 것이 아니라 동질감을 느끼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보니 몇 시간씩 카페에 앉아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궤도에 오르기 전까지는 하는 수 없이 나와 결이 맞는 유저들을 한 명, 두 명 만나며 커뮤니티를 늘려가는 일을 지루하게 쌓아야만 한다. 근데 이러다가 세월을 정통으로 맞고 나이 먹어서까지 콘텐츠 만드는 건 아닐까. 그러면 막 팔순잔치 때 직접 드럼 치고 기타 치면서 유튜브 채널로 라이브하고 슈퍼챗 받는 할아버지가 되는 건가. 기대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