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목 Apr 06. 2016

손수 가꾸는 삶 내 손으로 만들어 간다는 것의 의미

북트의 서점 창업 - 2

페인트 칠을 하면 처음엔 멍하니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냥 치덕치덕 붓으로 페인트를 바르면 된다. 손이 닿지 않으면 롤러를 사용하여 휘적휘적, 롤러가 닿지 않는 구석은 다시 붓으로 치덕치덕. 벽과 천장을 모두 하얀색으로 칠하고 있자니 머릿속도 하얘진다. 바르는 시간 동안은 아무 것도 할게 없으니 생각이 이리 튀고 저리 튄다. 자유로운 연상이 시작되었다가 이내 한가지 음악이 뇌리에 박히면 그때부터 하루종일 그 음악이 머릿속에서 플레이된다. 오늘은 라디오 씨엠송이다. 머리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흥얼흥얼 입에도 붙는다. 그러다가 다른 생각이 떠오른다. 생각이 머릿속을 휘젓고 돌아다니지만 내가 원해서 나오는 생각들이 아니다. 흡사 나와 머리는 별개라고 외치듯 머리속의 생각들은 내가 원하는 생각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이리로 저리로 튀면서 전혀 생각지도 못한 생각들을 만들어 내고 손에 닿지 않는 곳으로 던져놓는다.  


해답이 없는 답을 생각하는 것은 시간낭비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사고의 과정이 결과보다 낫다. 답은 뻔하지만 뻔하지 않은 과정으로 도달되는 뻔한 결론은 언제나 유익하다. 평일에는 이런 생각을 해볼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지만, 오늘같이 페인트 칠하는 날이면 몰아서 해볼만 하다. 그러나 초보의 페인팅은 하루만에 끝나지 않는다. 3일째가 되어서야 얼추 완성됐지만 전문가처럼 꼼꼼하면서 완벽하고 깔끔하지 못하다. 바닥은 이미 페인트 투성이고 완성도는 낮았지만 나는 오랫동안 상념 속에서 상상을 즐겼다.


이렇게 3일동안 한 것이 페인트 칠하기가 아니라 생각하기 였는데 그렇다고 무슨 성과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성과를 목표로 두었다면 이렇게 생각을 흘러가게 놔두지 않았겠지. 그냥, 이것은 전혀 다른 움직임이었고 계획없는 여행이었고 붓을 들고 나를 만나는 신선한 경험이었다. 어딘가 여행을 다녀오고 나면 뭘 했었는지 어디에 갔었는디가 꿈만 같은 뭐 그런 기분이고 느낌이다. 충분한 사색의 여행을 즐긴 듯 하다. 매일 페인트를 바르라면 못하겠지만, 살면서 한 두번 하는 일이니 즐거움의 시간이 가능했다.

페인트를 다 발랐다. 요즘 페인트가 잘 나와서 냄새도 안나고 매끈하게 잘 발리니 기술 없이도 손쉽게 할 수 있다. 서점 들어오는 지하가 너무나 칙칙하고 어둑해서 약간 꺼리게 된다. 이곳에 흰색과 옅은 민트색을 칠해두니 훨씬 밝아졌다. 내가 이걸 해냈어! 라는 뿌듯함은 별로 없다. 누구나 칠하면 그냥 다 할 수 있은 일이기도 하니까. 그것 보다는 뭔가를 위해 과정을 만들어가는 동안은 전혀 다른 여행을 하기 마련이니 그런 경험을 얻은 것이야말로 손수 무언가를 만든다는 가치를 설명하기엔 충분하지 싶다.

작가의 이전글 익숙해지는데 걸리는 시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