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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ti Jan 30. 2024

'이중섭의 스승'과 '나혜석의 후배'라는 수식어

  국립현대미술관 특별전에서 임용련의 <에르블레 풍경>이라는 작품을 봤다. 임용련은 어떠한 화가인가를 찾아보다가 남아 있는 작품이 이 작품 이외에 거의 전무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대중 인지도가 낮을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다. <에르블레 풍경> 작품은 1930년대 프랑스에서 작품 활동을 했던 임용련, 백남순 부부의 신혼집 풍경을 그린 것이라 했다. 임용련은 평안북도 오산학교에서 이중섭을 가르치기도 했고, 그의 부인 백남순은 프랑스 유학 도중 나혜석을 만나 함께 작품 활동을 이야기하기도 했었다. 그리하여 이들 부부는 지금도 '이중섭의 스승', '나혜석의 후배'로 누군가의 보조 역할로 더 많이 소개되곤 했다. 이들 부부가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전시장에 걸 작품이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일제강점기 평안북도 정주 지역에서 교사 생활을 하며 작품 활동을 하는데, 해방 이후 월남하면서 작품을 한 점도 가져오지 못했다고 한다.


  남편 임용련과 부인 백남순은 각각 미국과 일본에서 그림을 배웠다. 이들의 이력이 좀 흥미롭다. 백남순은 도쿄 여자미술대학을 졸업하나 후 파리로 유학하러 간다. 그녀는 거기서 미국 예일대에서 그림을 배우고 온 화가 임용련을 만난다. 그들은 1930년 결론을 했고 몇 달 후 한국으로 돌아와 '최초의 부부 화가' 전시를 한다. 당시 이광수는 "이 부부가 조선의 한 쌍 보물인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라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임용련이 화가가 된 계기는 드라마틱하다. 배재고보 학생이던 임용련은 19세 나이로 3·1 운동에 적극 가담하였고 이로 인해 수배령이 떨어진다. 그는 만주로 도피하고 이어 난징으로 이동하여 금릉 대학에 진학한다. 그곳에서 중국인 여권을 만들어 미국으로 건너간다. 그곳에서 시카고 미술학교와 예일대학 미술대학에서 그림을 배운다. 수석 졸업한 임용련은 유럽 여행 장학금을 받아 프랑스에 갔고 그곳에서 백남순을 만났던 것이다. 3·1 운동이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던 것처럼, 임용련의 인생에서 3·1 운동 또한 큰 분기점이 된 셈이다. <에르블레 풍경> 작품 하단에는 P.YIM이라는 이니셜이 있다. 임용련이 3·1 운동으로 수배령이 내려져 중국으로 피신했다가 미국으로 건너갈 때 여권에 사용했던 '임파'라는 가명의 약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현대사의 한 장면을 비켜가지 못했다. 한국전쟁 당시 집에 숨어 있다가 인민군에 끌려갔고 그 이후 생사는 알려지지 않았다. 부인 백남순은 임용련이 그때 죽었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백남순은 이후 부산에 내려가 살다가 1960년대 미국으로 건너가 버린다.

이렇게 잊힌 임용련, 백남순 화가 부부는 1981년 미술사학자 이구열 선생에 의해 다시 한번 빛을 보게 된다. 이구열 선생은 미국에 건너가 77세의 백남순 화백을 만났고, <여성동아>에 '누가 근대의 선구자적 여류 작가 백남순 여사를 모르시나요'라는 글을 기고한다. 이전까지 최초의 프랑스 여성 유학생이 나혜석이라고 알려져 있던 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이야기와 함께 백남순의 사연을 소개한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백남순과 함께 근무한 적이 있던 교사 민영순은 기사를 읽으며 자신의 집에 보관되어 있는 임용련의 그림 한 점을 떠올린다. 그녀는 이구열 선생에게 자신이 임용련의 그림을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한다. 이전까지 임용련과 백남순의 작품은 한국에 한 점도 전하지 않고 있었으니 놀라운 일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세상에 나온 것이 임용련의 1930년 작 <에르블레 풍경>이다. 임용련 부부는 이제 막 결혼한 동료 교사 민영순에게 프랑스 자신들의 신혼집 밖의 풍경이 담긴 작품을 선물했던 모양이다. 작품의 소유자인 민영순은 미국에 있는 백남순과 40여 년 만에 연락이 닿았고, 이 그림을 돌려주겠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백남순은 고국에 남편의 작품 하나가 남아 있으면 좋겠다며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 의사를 밝혔다. 미술관에 걸려 있던 크기도 작은 이 작품 한 점은 이런 사연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옛날 신문을 검색하다가, 1985년 미술사학자 윤범모가 백남순을 인터뷰한 내용을 보게 되었다. '내 인생에서 그때 그랬더라면'이라는 회한이 담긴 82세 노화가의 이야기가 아릿하게 다가온다.


"파리에서 나혜석 선배와 만났는데 우리는 오랫동안 그곳에 머물면서 함께 그림이나 그리자고 약속했지요. 마침 외교관 신분으로 세계 일주를 하던 부군 김우영 씨에게 나혜석 선배는 파리 체재를 간청하기를 이르렀습니다. 나까지 합세하면 우리 둘이 아틀리에 하나를 얻어 그림을 그리면 생활비도 적게 들뿐 아니라 미술 연구에도 크게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고 설득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나혜석 선배는 부군의 허락을 못 얻은 채 귀국하게 되었어요.

비록 그가 파리 유학의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나에게 "그림은 뭐 하는 거냐. 시집이나 가라."라고 섭섭한 말을 남겼지만, 그때 둘이서 파리에 함께 있게 되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한이 되어 남아 있습니다. 부군과 이혼하고 불행하게 최후를 맞은 나혜석 선배나 작품 하나 반듯하게 남기지 못하고 외국에서 살고 있는 나의 처지가 이렇게 기구하게는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 경향신문(1985.2.8) -


화가 임용련과 백남순, '이중섭의 스승', '나혜석의 후배'라는 수식어로만 스쳐지나 가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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