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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ti Jan 30. 2024

미술사 대학원 수업은 강의실이 아닌 미술관에서도

대학원 수업은 종종 강의실이 아니라 미술관 특별전 관람으로 진행되었다. 미술관 학예사들 역시 미술사 연구자 출신이기도 해서, 교수님은 안면 있는 학예사들과 미리 연락해서 설명을 들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작품 자체에 대한 설명뿐 아니라, 이 전시가 어떠한 의도에서 기획된 것인지, 작품을 대여하는 과정에서 어떠한 일화가 있었는지 등등의 이야기까지 듣곤 했다. 강의실 PPT 화면에서 보던 도판 이미지를 실제 물감의 질감과 두께감을 느끼면서 대면하는 경험은 특별한 것이었다. 하지만 한편 내 공부가 얼마나 짧은 지를 직면하는 일이기도 했다.


대학원 선배들은 그림 앞에 서서 감상을 주고받곤 했다. 나와 같이 '멋있다', '잘 그렸다'와 같은 1차원적 감상이 아니었다. "A 화가의 이 작품은 A 화가의 작품 생애 가운데 어떠한 시점에서 그려져서 이러한 특징이 있다.", 혹은 "B 작가의 이 작품은 C 작가의 화풍과 유사하면서 또 어떠한 측면에서 차이가 있다." 하는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그때 '이당', '소전', '청전'이라는 작가들의 호가 대화 속에 오고 갔는데, 겨우 화가들의 이름을 익힌 상태의 나는 작가명과 호를 연결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A 작품과 B 작품을 비교하려면 A와 B를 먼저 각각 알고 있어야 한다. A 작품에 서서 B 작품과 비슷하지 않냐고 묻는데, B를 알지 못하는 나는 그저 눈을 끔뻑끔뻑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C 작가와 D 작가의 화풍이 유사하다고 하는데 C 작가를 그의 호인 C-1으로 부를 경우 생각의 회로는 또 꼬이고 말았다.


흡사 Fe가 철, Cu가 구리를 의미하는 기호인 줄도 모르고 화학과에 입학한 학생 격이었다. 그간 역사 수업 시간마다 알은체나 하던 선생 노릇을 하다가 한없이 겸손해지는 시간을 보냈다. 그러고 보니, 대학원 입학하고 몇 달 동안 내가 제일 많이 했던 말은 "아, 그래요?"였다. '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과천관, 고궁박물관과 현대갤러리는 광화문 부근에 모여 있어서 종종 들르곤 했다. 용산에 있는 아모레 퍼시픽 미술관은 좋은 전시를 많이 해서 특별전이 열린다고 하면 함께 들러보곤 했다. 평일 낮에 미술관 전시를 보러 가면 한 작품에 머물러 편하게 감상할 수 있었다. 줄지어 앞뒤 사람의 흐름에 방해되지 않도록 적당히 움직이며 작품을 감상하던 주말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평일 낮의 시간은 월급 노동자들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금단의 시간이었다. 내가 휴직자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는 순간은 종종 있었는데, 우선 15년 동안 매달 17일마다 급여 입금을 알리던 문자 메시지가 오지 않을 때와 함께 평일 오후 3시, 관람객이 그리 많지 않은 고요한 미술관에서 천천히 관람하던 순간이었다.


미술관 전시도 영화나 드라마 비슷하게 잘 기획되고 홍보도 잘 되면 관람객이 줄지어 온다. 미술관은 여러 특별전을 기획한다. 상설 전시실을 통해 자신들의 소장품을 소개하지만, 관람객은 늘 같은 작품이 걸려 있는 공간을 여러 차례 방문하지 않는다. 미술관이 지속해서 관람자를 유인하기 위해서는 기획 특별전을 선보여야 한다. 대개 어떠한 화가의 탄생 몇 주년 기념전을 하여 한 인물을 조명하기도 하고, 주제를 중심으로 한 기획을 하기도 한다. 어떤 전시는 입장 대기를 하고 있어야 할 정도로 인기가 있기도 했다. 소위 대박 난 전시는 대개 대중에게 사랑받는 작가의 특별전일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면 어떠한 작가가 대중에게 사랑받는가. 작가는 당연히 작품으로 설명할 수 있으니, 남아 있는 작품이 많을수록 좋다. 하지만 작품이 전시장에 많이 걸린다고 해서 대중적 관심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작품의 완성도가 높기도 해야겠지만 작가를 둘러싼 이야기들이 풍부하면 더 좋다. 작가가 가족이나 친구에게 남긴 편지나 엽서 등이 많이 남아 있으면 좋다. 편지는 일기만큼이나 내밀한 이야기를 담고 있으니, 화가의 인생을 드라마틱하게 재구성하기에 좋은 재료가 된다. 인생이 파란만장할수록 이야깃거리는 많아진다. 각각의 작품의 표현 형태나 등장하는 도상 등은 작가의 당시 심리 상태가 투영된 것으로 해석되어 관람자에게 더 큰 감흥을 준다.


한 가지 더, 작가와 작품 이외의 부수적인 조건 하나가 더 있다. 작가의 배우자가 동종의 화가여서, 작가 사후에 미술관 건립, 특별전이나 회고록 등의 작업을 통해 대중에게 기억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또는 유족이 사회적 지위가 높거나 경제력이 있다면, 작가를 대상으로 한 학술대회를 개최하거나 연구자나 학회에 지원금을 후원한다면 작가가 조명받을 기회는 많아지는 듯했다.


잘 기획된 특별전, 이제 갓 따끈하게 나온 연구들이 소개되는 학술대회를 다녀올 때마다, 나는 어떠한 전공을 선택해야 할까, 어떤 논문 주제를 잡아야 할까에 대한 고민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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