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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ti Jan 26. 2024

대학원 새내기 OT에 가다

대학원 입학 한 달 전, 미술사학과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안내 문자를 받았다. '새내기 OT', 이 얼마나 설레는 말이겠느냐마는 샤방샤방한 새내기를 기대했을 선배 대학원생들 앞에 내가 나타났을 때, 그들이 적잖이 당황하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모두 7명이 입학했고, 그 가운데 5명이 미술사학과 학부 전공자들이라고 했다. 다른 과 출신은 2명, 그나마 나이 든 대학원생은 나뿐이었다.


OT 시간에 선배들은 대학원 학기별로 논문 준비를 위해 어떠한 절차를 밟게 되는지를 설명했다. 대학원 생활은 논문 완성이라는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 여정이었다. 애초 학위나 논문이 필요해서 입학한 게 아니었던 나는 이 여정에 어느 정도 발을 담가야 하는지 잠시 혼란스러워졌다.


선배들에게 논문은 꼭 써야 하는지를 물었다. 그러자 한 선배는 논문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다면 일반대학원이 아니라 특수대학원으로 갔어도 좋았을 거라고 답했다. 특수대학원에는 직장을 끝나고 야간에 수업을 들으러 오는 나이 많으신 분들이 많다고 했다. 아마도 내 또래들은 그곳에 있었을 듯싶었다. 특수대학원으로 가야 했던 걸까요라고 물으니, 선배들은 일반대학원은 수업의 밀도가 달라서 이곳이 공부 환경은 더 좋을 거라 했다.

나는 다시 또 선배들에게 영어를 놓아 버린 지가 오래되었는데 대학원 수업에는 원서 수업이 많은지를 물었다. 영어 앞에서는 주눅이 들어버리는 내가 영어 원서를 잘 읽어낼 수 있을지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선배들은 영어뿐 아니라 중국어나 일본어 둘 중, 하나는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답했다. 본인들은 학부생 시절부터 대학원 진학을 계획하면서 중국어나 일본어 스터디를 꾸려서 준비해 왔다고 했다.


이야기를 나눌수록 나는 이 공간에 어울리는 사람일까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밀려왔다. 일반대학원 생활이 어떤 것일지는 대학원생 커뮤니티를 한 번도 훑어봐도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혹여 오가는 이야기를 읽으며 지레 겁을 먹고 싶지는 않았던 탓에 인터넷 검색 한번 해 보지 않았었다. 애써 외면하고 싶었던, 굳이 미리 알아서 겁먹고 싶지 않아서 회피했던 정보들을 새내기 OT 자리에서 막상 듣고 나니 마음이 한없이 쪼그라들었다. 이야기를 나눌수록 그간의 교직 경력이 이곳에서는 큰 자산이 되지 않는다는 걸, 직면하는 기분이었다.


OT를 마치고 대학 캠퍼스를 둘러봤다. 새내기 대학생을 맞이하는 학교는 들떠 보였다. 새내기 대상으로 동아리를 홍보하는 현수막들이 재치 있는 문구와 함께 걸려 있었다. 문득 내 대학 동기들이 생각났다. 수업이 끝나면 우르르 과방으로 몰려가서 가죽일 리 없는 푹 꺼진 레자 소파에 앉아 과방일기도 쓰고 대자보도 쓰고 기타도 치고 그랬던 동기들. 우리는 이제 막 고등학생에서 벗어났다는 초짜의 티를 내고 싶지 않아 애쓴 흔적이 역력한 화장과 옷차림으로 학교 주변을 몰려다니곤 했었다. 모두가 같은 스무 살, 이 조건은 특별히 어떠한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되는 자산이기도 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대학 동기들이 있는 단체톡방에 잠시 휴직하고 대학원에 간다는 소식을 전했다.


스무 살 이상 어린 이 대학원 선배님들과 동기들과 내가 과연 잘 지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을 전하자, 지혜로운 동기는 이런 답을 남겼다. "그들에게는 젊음이 있고, 우리에게는 돈이 있으니까, 입은 다물고 지갑은 열면서 친하게 지내.", 맞네. 나에게는 현금이 있으니.


마침, 그날 출판사에서 입금 문자 메시지가 왔었다. 이전에 같이 작업했던 어린이책 출판사에서 기획안을 보여주시면서 신간 도서를 제안해 오셨는데 얼마 전 계약서에 서로 도장을 찍었던 터였다. 이전에는 오랜 기간 붙잡고 완성한 원고를 출판사에 보내 통과되기를 기다리곤 했는데, 이번에는 원고 없이 원고료부터 받았다. 완성물이 없는데 선입금을 받은 것이 고맙고 한편 부담스럽기도 했다. 편집자님에게 이러한 마음을 전했더니, "편하게 써 주세요. 저희에게는 일단 믿고 보는 저자니까요."라는 다정한 답장이 왔다. OT 자리에서 내내 쭈그러들었던 마음이 살짝 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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