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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ti Jan 25. 2024

휴직하고 원서를 넣었다.

늘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인 시간이었다. 아이를 낳고 일 년 만에 복직한 고등학교 생활은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다. 신규 교사로 첫 학교에 발령받았을 때는 수업 준비 열심히 하는 교사로 관리자나 동료에게 좋은 말만 듣고 살았는데, 아이를 낳고 학교에 복직하니 '아줌마 선생님'이 되어버렸다.


이제 갓 15개월이 된 아이를 맡길 곳이 없어서 집 근처 가정 위탁을 선택했다. 아침 8시부터 0교시 보충수업을 하던 시절이라, 해도 뜨지 않은 아침 7시에 집을 나섰다. 잠들어 있는 아이를 작은 이불에 둘둘 감싸서 이모님 댁 초인종을 누르고 건네주고 출근했다.


당시는 고등학교는 학생들이 강제로 밤 9시까지 야간 '자율' 학습해야 했다. 담임을 맡은 나는 일주일에 한 번 야자 감독을 담당했다. 하지만 학년의 다른 동료 교사들은 거의 날마다 그 시간까지 남아 있었다. 담임교사가 매일 남아 있는 학급과 나처럼 담임이 상주하지 않는 학급의 야자 인원이 같을 리가 없었다. 학급별 야자 참석 인원은 엑셀로 정리되어 매일 아침 학교 관리자에게 전달되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 교감 선생님에게 잠시 내려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교감 선생님은 우리 반만 유독 야자 참석 인원이 적은 이유를 물었고, 야자 감독이 아닌 날에도 야자 시작하는 것만 보고 가도 반 상태가 훨씬 좋아질 거라고 했다. 아이를 데리러 가야 하는 시간 때문에 어렵다고 답을 하자, 다른 아이 엄마 교사들은 다 그렇게 하는데 왜 나만 못하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이어졌다.     


'아이 키우는 여교사'는 동질한 집단이 아니다. 시댁이나 친정 부모의 도움을 받아 양육하는 환경에 있는 이들은 갑자기 오늘 저녁에 회식하자는 말에도 이를 어쩌나 하는 마음을 갖지 않아도 된다. 혹은 상대 배우자가 초, 중등 교사일 경우 상대적으로 일반 직장에 비해 퇴근 시간이 빠른 편이므로 양육에서 유리한 조건이 된다. 하지만 나처럼 일반 직장에 다니는 남편을 둔, 시댁과 친정의 육아 조력을 받지 못하는 이는 '퇴근에만 신경 쓰는 직장 여성'의 딱지가 붙게 된다.


내가 중고등학생 시절일 때, 장래 희망으로 교사가 되고 싶다고 하면, '여자 직업으로 교사만 한 게 없다'는 말이 따라붙곤 했다. 그런데 만약 내가 남학생이었으면 '남자 직업으로 교사만 한 게 없다'라고 이야기를 들었을까. 여성 수준에서의 '적당한 성취', 출산으로 경력 단절되지 않는 직업 환경, 남들보다 조금 이른 퇴근으로 애 키우는 좋은 직업이라는 사회적 인식. '여교사'라는 말에는 사회적 성취뿐 아니라 '아이 키우면서 일하기에 나쁘지 않은 직업'이라는 꼬리말이 따라붙었다. 그러나 아이를 맡기고 키울 비빌 언덕이 없는 나는 직장에서도 집에서도 종종종하는 삶이 이어졌다.


교감 선생님은 내게 담임 반 아이들의 저녁 6시 20분 야자 시작만 보고 집에 가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냐고 묻었다. 궁금함을 바탕으로 한 질문인지, 책임감이 부족한 것이 아니냐는 힐책인지를 구분하기 어려운 그 문장 앞에 아무런 대꾸를 하지 못했다. 본교무실 문 밖을 나설 때까지도 잘 참고 있다가, 퇴근하는 길에 주차장에서 차에 나서야 마음놓고 펑펑 울었다. 관리자로 승진한 50대 후반의 남성 교사, 이분 인생에서는 종종거리면서 아이를 데리러 어린이집과 유치원으로 뛰어갔던 적은 과연 몇 번이나 있었을까. 


하지만, 당시에는 관리자의 말들이 부당하다고만 생각되지는 않았다. 나는 반 아이들에게도 늘 미안한 마음이었다. 다른 학급은 담임 선생님이 교무실에 늦은 밤까지 함께 남아주는데, 고작 일주일에 한 번 당번 날에만 그걸 할 수 있는 나는 학급 학생들에게 담임 역할을 온전히 못하고 있다는 자책감이 있었다. 그런 우리 반 녀석들과 마주치고 싶지 않아서 아이들이 석식을 먹으러 식당으로 이동하고 난 뒤 교무실에서 빠져나와 서둘러 주차장으로 가곤 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마주친 우리 반 아이들은 "칼퇴하시네요"라는 악의 없는 인사를 건네곤 했다. '칼퇴'라는 말은 법적으로 정해진 근무 시간을 마친 노동자의 퇴근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만드는 옳지 않은 용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지만, 학교의 엄마와 같은 담임교사인 나는 학생들을 교실에 남겨두고 가는 발걸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학생과 교사가 모두 밤 9시까지 남아 있어야 했던 시절, 사교육의 혜택을 입지 못하는 학생들을 우리 공교육이 책임져야 하지 않겠느냐는 주장 앞에 교사의 노동권을 논한다는 것은 '스승답지' 못한 행위였던 시절. 아이를 낳고 키우며 직장 생활을 하는 것은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범주의 삶이 아니었다. 엄마가 된 삶은 축복이었지만, 나 스스로를 무능력하고 성실하지 않은 사람으로 마음이 쪼그라들게 하는 또 다른 삶의 시작이기도 했다. 퇴근 시간이 되자마자 가방을 싸고 교무실을 빠져나가는 다른 선배 여교사들을 '수업에 마음을 다하지 않는 교사'라고 규정했던 몇 년 전의 내가 너무 부끄러워지는 시간을 보냈다.


소설가 김연수의 에세이에는 그가 서울로 유학을 와서 혼자 자취하며, 자취방 창문 밖 풍경을 보며 쓴 감상이 담겨 있다. 혼자 자취하며 외로운 밤을 여러 번 보내지 않았더라면 "너를 안다. 정말 잘 안다. 네가 틀렸다는 것을 안다. 그걸 알기 때문에 나는 옳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고. 김연수 인생에 '혼자 자취하던 외로운 밤'이 있었다면, 내 인생에는 '직장 다니는 엄마의 포지션'이 그에 해당했다. 어쩌면 나는 이 시간을 겪지 않았더라면 다른 이에게 "지금보다 더 노력해 봐"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동료 교사들은 주말에 교과 모임도 나가고, 배움의 공동체 모임도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일상이 늘 버거운 나는 주말이면 남편에게 아이를 맡기고 그냥 자고만 싶었다. 그렇게 10여 년이 지나 육아와 직장 생활로 모든 것이 소진된 상태에 이르렀다. 남편에게 잠시 쉬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새벽마다 남의 집에 자는 채로 맡겨지던 아이가 어느덧 자라, 초등학교 4학년이 되었을 때, 나는 미술사 대학원에 원서를 넣었다. 합격자 발표를 보자마자, 연수 휴직을 신청했고, 대출을 받았다.


나 한 명만 돌보면 되던 스무 살의 대학생 시절과 달리, 마흔이 넘어서 휴직하고 돌아오게 된 늦깎이 학생이 되자, 모든 게 절실하고 감사했다. 대학 강의실에 앉아 있는 게, 가끔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한 달에 한 번씩 따박따박 들어오던 월급은 중단되지만, 긴 시간 육아와 직장 생활로 모든 것이 소진해 버린 나를 돌보고, 하루를 온전히 내가 설계할 수 있는 시간을 월급 기회비용으로 지불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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