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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ti Feb 15. 2024

매향리 마을 이야기

  대학원 생활은 내가 이전에 알지 못했던 세계를 보게 되는 계기를 만들곤 했다. 그림을 보면 그 작가를 알게 되고, 그 작가를 알면 그의 서사를 알다가, 새로운 세계를 만나게 되었다. 이야기의 첫출발은 이랬다. 교수님은 새 학기 첫 수업 시간에 탈북화가 선무의 전시를 소개해 주셨다. 전시는 경기도 평택에 있는 매향리 스튜디오에서 진행 중이었다.


  전시 작품은 고작 3점밖에 걸려 있지 않은 조촐한 전시인 듯했다. 작가는 트럼프, 김정은,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 초상을 크게 그려 걸어두었다. 이전해, 판문점 선언이 발표되고 남과 북 그리고 미국과 북한 사이의 화해 분위기가 무르익던 시절에 그려진 작품이었다. 이런 그림을 다른 이도 아닌 탈북 출신의 화가가 그렸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새 학기 초라, 아직은 과제가 쏟아지지 않는 때였다. 하지만, 방학을 보냈다가 이제 엔진에 시동을 걸어야 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부담스러운 때이기도 했다. 하루 나절, 외곽에서 바람이나 쐬자는 마음으로 경기도 평택 매향리 마을로 향했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고철 덩어리들이 길옆에 쌓여 있었다. 이 작은 마을하고는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물건들, 포탄이었다. 이 마을은 오랜 기간 쿠니 미공군 사격장이 있던 곳이었다. 마을 안에는 매향리 스튜디오가 있었다. 미군이 주둔했던 당시, 교회로 사용되던 건물이 지금은 전시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전시장 안에는 마을 주민 한 분이 해설사로 앉아 계셨다.


이 작품을 그린 선무 작가를 만나볼 수 있는지를 물었더니, 그건 어렵다고 했다. 하긴, 선무는 얼굴을 드러내고 활동하는 작가가 아니었다. 마을 주변에 왜 여전히 이런 포탄 잔재가 쌓여 있는지 등을 물으면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때 이곳에 들르신 칠십 정도 되신 어르신들께서는 내게 매향리가 어떤 곳인지 아냐고 물어오셨다. 미 공군 사격장 인근 지역에서 사는 삶이 어떤 것인지, 50여 년을 듣고 살아온 폭격 소음은 어떠했는지, 당신들이 이 환경을 바꾸려고 어떤 노력을 했는지를 들려주기 시작하셨다. 1950년대 한국전쟁 기간에 경기도 평택 매향리에 미공군이 폭격 연습을 하기 위한 기지가 설치되었다고 했다. 주민들은 전쟁이 끝났으니 이제 군인들이 철수하겠지 했으나, 이들은 종전 이후에도 여전히 이곳에 머물렀고, 2005년에 이르러서야 이곳에서 폭격이 사라지게 되었다고 했다. 나는 도통 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한 어르신께서 역사교사가 이런 것도 모르고 살았냐고 핀잔을 주셨다.


이야기 끝에 한 어르신이 내게 마을의 누군가를 만나봐야 한다고 하셨다. 사실 이 제안이 내게 솔깃했던 건 아니었다. 사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혹시라도 탈북화가 선무를 만날 수 있을까 해서였다. 전시장에는 작가가 상주하기도 하니까, 그를 만나게 되면 북한미술과 관련한 구술 자료를 얻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갑작스레 매향리 주민들을 만나서 매향리의 역사를 듣게 되리라는 것은 내가 계획한 일정에는 없던 상황이었다.

내가 별다른 호응을 하지 않자, 어르신께서는 "위인이 책에만 있는 게 아니야. 전만규가 바로 전봉준 같은 사람이야"라고 하셨다. 곧바로 전화 연락을 하시더니, 나를 그분이 계신 곳으로 안내해 주셨다.


 마을회관에는 <청년 전만규>라는 전시가 진행 중이었다. 그곳에서 마을 주민들의 두터운 신망을 얻고 계신 전만규 위원장을 만나게 되었다. 전시실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주황색 깃발을 찢고 있는 젊은 시절의 전만규 위원장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었다. 미 공군은 자신들이 사격훈련을 할 때마다 기지 주변에 주황색 깃발을 올려, 주민들에게 사격이 있을 거라는 것을 알렸다고 했다. 그때 전 위원장은 그 안에 들어가 깃발을 찢어버렸다고 했다. 마을 주민에게 폭탄 투하 연습을 알리는 안내문에는 시간대별 폭격 예정 시간이 적혀 있었다. 낮뿐 아니라 자정에도 폭격은 진행되고 있었다. 전쟁을 대비한 훈련이니 야간 전투 상황과 같은 시간대에 훈련이 진행되었던 모양이다. 매향리 주민들은 훈련 기간에 밤낮으로 전투기에서 떨어지는 포탄 소리를 50년 동안 듣고 살아야 했다.


훈련장을 왜 이렇게 주민들이 사는 곳과 가깝게 지었을까. 그건 우연이 아니라 의도적인 것이라 했다. 민간인 거주지와 멀리 떨어진 곳을 대상으로 폭격 훈련을 하다 보면, 막상 실제 전시 상황에서 민간인 거주 지역에 폭격 발사 버튼을 누를 때 망설이더라는 것이다. 매향리는 '실제 상황에 가장 가깝게 훈련하기 위해' 선정된 장소였고, 주민들은 그곳에서 50여 년 동안 포탄 투하의 소음을 견디고 살아야 했다. 고막을 찢을 듯한 폭력적인 소리를 듣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은 단순히 청력만 상실하는 것이 아니었다. 마을의 주민들은 스트레스성 장애로 우울증을 앓거나 폭력성을 갖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전 위원장의 기록물을 살펴보다가, 딸이 보내온 편지를 보게 되었다. 거기에는 우리들은 잘 지내고 있다는 이야기, 아빠는 언제 오냐는 이야기들이 적혀 있었다. 그는 매향리에서 주민들이 평화롭게 살 수 있게 해 달라는 시위를 하다가 감옥에 투옥되기도 했던 모양이었다. 



미군의 군사 훈련을 방해했으니, 미국 입국도 금지된 인물이 되어버렸다. 애초부터 이 일에 뛰어들었던 건 아니라고 했다. 폭격 소리가 지긋지긋해서 돈 많이 벌고 떠나고 싶어서 젊은 시절에는 쿠웨이트로 일하러 나갔다고 했다. 그런데 이 마을에 왜 다시 돌아오신 거냐고 묻자, 아버지께서 스트레스성 장애로 돌아가시게 되면서, 결국 고향 문제를 외면하고 혼자 도망갈 수 없었다고 하셨다.

이후로도 매향리 마을에 초등학생들과 고등학생들과 다시 답사를 갔었다. 그리고 전 위원장님과 아이들이 만났다. 



초등학생들은 왜 미군은 자신들의 땅을 두고서, 우리나라에 와서 폭격 연습을 했느냐고 물었다. 어찌 보면 매향리 문제의 가장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질문이라 할 수 있었다. 고등학생들은 1951년 미군이 매향리에 들어올 때, 공식적인 허가를 받고 들어왔는지, 마을 주민들의 토지 점유에 대해 보상은 이루어졌는지, 2005년 미 공군기지가 폐쇄되고 이후 마을 주민들은 합당한 피해 보상은 받았는지를 물었다. 그리고 매향리 주민들은 왜 이렇게 힘든 땅을 떠나지 않고 계속 살았던 것인지를 물었다. 좋은 수업은 답을 찾게 하는 게 아니라 질문을 갖게 만드는 것이라고들 이야기한다. 마찬가지로 좋은 답사란 내가 몰랐던 공간에 대한 이해를 확장하고 질문을 갖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외면하고 떠날 수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선택을 했던 이의 삶을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속에 질문 하나를 던지는 일이라 생각한다.


2005년 미 공군이 철수하고 난 미군 부대의 관사는 그대로 폐허로 남아 있었다. 아이들과 그곳 관제탑에 올라가서, 공중 폭격으로 절반이 사라져 버린 농섬을 봤다. 근처 선착장에 가서 예쁜 조가비도 줍고 바닷물에 물수제비도 떴다. 지나가다 들렀으면 노을이 멋진 바다로만 알고 지나갔을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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