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야, 말발 좀 세워주라"의 후속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종로의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그날은 비가 내렸다. 주점 안에 들어갔더니 그녀가 환한 미소로 우리를 반겼다. 둥근 원탁에 셋이 앉아 소주와 안주로 파전, 김치찌개를 주문했다. 나는 전에 봤던 적이 있기에 그녀에게 물었다.
"말 놔도 되는 거지?"
그녀도 같이 말을 놓으며 "응" 했다.
소주가 나오자 진수는 아무 말도 없이 잔을 비웠다.
그때까지 내가 경험한 바로는 남자가 여자 앞에서 소리 없이 술을 마신다는 것은 두 가지 이유였다. 하나는 여자의 마음을 얻으려고 잔뜩 무게를 잡으며 목소리는 낮은 톤으로, 최대한 적게, 필요할 때만 "응" 혹은 "그렇지" 등의 대답만 하는 것이요. 하나는 자신감은 독한 소주와 함께 몸속으로 삼켜버렸는지 어깻죽지는 축 늘어뜨린 채 얼굴은 빨갛게, 머릿속은 온갖 잡동사니 생각들의 부유 속에서 소주잔만 비운다는 것이다.
진수는 원래 술을 잘 못했다. 분위기 전환용 멘트로 필요하다 싶어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얘! 너는 만난 지 얼마나 된다고 헤어진다고 그러니?"
"....."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웃기만 했다.
진수도 침묵하며 계속 소주잔을 연거푸 비우더니 얼마 안 지나서 취했는지 말투도 어눌해져 갔다. 그러자 나는 속으로, "이 녀석 이러면 안 되는데. 쪽팔리게."라고 중얼거리며, 하는 수 없이, 그녀에게 묵직하게 목소리에 잔뜩 무게를 잡고 말했다.
"이렇게 착한 놈을 왜 울려! 너는 엉!"
"아니야, 울리긴 무슨."
"잘해봐라, 쫌! 괜찮은 놈이니까."
그러자 그녀는 또 웃었다.
그 순간이었다. 저 웃음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그리는 미소가 아닌데, 라는 느낌이 팍. 팍. 왔다. 고교를 졸업한 지 얼마 안 된 나였지만, 여자의 심리 포착에는 한 소질이 있었다고 자부했던 터라,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그 웃음은 이성에게만 보낼 수 있는 특별한 전파였다는 것을. 그리고 혹시 애가 나한테 마음이 있는 게 아닌가, 라는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였다.
진수가 화장실을 갔다 온다고 자리를 떴다. 그는 거의 인사불성이었다.
다시 잠시 후.
혹시나 했던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실내에 천둥번개소리가 울렸다. 다른 사람은 듣지 못하는 소리가.
"우르릉 쾅쾅" 하고.
그녀가 큰 눈을 반짝거리며 나에게로 큐피드의 화살을 날렸다.
"나는 실은 처음부터 네가 좋았어!"
아닌 밤 홍두깨라더니.
그러나 나는 태연하고 나지막이 말했다.
"야, 네가 나를 언제 봤다고?"
"그날 디스코테크."
"노! 땡큐다. 나 좋아하지 마라. 바람둥이야."
"괜찮아."
"얘가 정말. 아무리 진수가 재수하다가 만난 친구지만, 안 된다."
그러자 그녀는 또 웃기만 했다.
"너는 왜 내가 말만 하면 웃니?"
"네가 좋아서."
다시 한번 우레가 울었다.
"우르릉 쾅쾅." 하고.
진수가 자리로 돌아왔다. 마셨던 술은 모두 몸 밖으로 내보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는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한 모습으로 말했다.
"야... 나... 먼저, 일...어. 날... 게."
그는 비틀거리며 자리를 뜨더니 출입문 쪽으로 향했다.
어... 야! 야! 그냥 가면 어쩌냐. 술 값은 누가 내고....,라는 말이 내 목구멍까지 차 오르며, 난감해하는 사이에 진수는 내 시야에서 벗어나고 말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광경에 나는 알코올이 잔잔하게 차있던 소주잔을 비우며, "크..." 하는 소리에 난감한 표정을 실어 그녀에게 보냈다.
그러나 그녀는 또 소리 없는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나는 네가 좋다고요, 라고 말하듯.
그렇게 그날, 나는 진수의 혹을 떼어 주려고 갔다가 내게 혹만 붙인 셈이 되고 말았다.
후속 이야기는 다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