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나는 네가 좋아"의 후속 글입니다.
대규모 행사가 있을 때는 많은 기간제 직원들이 들어온다. 그들 중 대부분은 경력 단절이 된 여성들이다. 점심 후에 그들과 테이블을 같이하면서 개인적인 얘기를 들을 기회가 있다. 몇 년 전이였다. 그녀는 남편과의 잦은 다툼으로 집에만 있으면 마음에 스트레스가 눈덩이처럼 쌓여가는 것을 치울 수 없는 지경에 이를 것 같아 도피처로 취업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남편이 자상하면 좋을 텐데, 라고 했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고민하는 한 여성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의 일상도 어쩌면 많은 사람들의 일상도 그러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양귀자 작가의 "모순"이라는 소설의 책장을 넘기다 보면 그곳에 우리들의 모순적 모습을 투영해 볼 수 있다. 주인공 안진진의 사랑과 연애, 그리고 결혼에서, 그녀 어머니와 쌍둥이 이모의 삶에서, 동생 진모의 현실과 이상을 넘나드는 철없는 청년의 모습에서, 안진진 아버지의 가족에 대한 모순적 사랑에서. 또 그녀 어머니의 리얼한 과장법에서도.
종이 안 주인공 안진진의 사랑은 이기적이다. 그러나 그 안에는 이상을 좇다가도 현실과 타협할 수밖에 없는 보통 우리들의 연약한(?) 모습도 있다. 내가 아는 후배는 누구 앞에서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과장이 없다. 그는 그래야 편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늘 당당하다. 반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자신이 초라해 보일까 약해 보일까 과장해서 치장하기도 과시하기도 하는 우리들의 일상. 심지어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기 싫어 사랑을 포기하기도 한다. 안진진처럼.
안진진 그녀는 김장우와 나영규 사이에서 누구와 결혼할까를 두고 고민한다. 김장우에게는 자신의 그대로를 보여주지 못하고 과장된 모습으로 남길 원하기에, 나영규에게는 솔직하면서도 결혼을 주저한다. 그것은 사랑이 아닐 거라며. 결국 그녀는 껍질을 다 벗기지 못한 채 김장우에게 자신을 보여줄 수 있음에도(?) 그러하지 못하고, 그녀의 본체를 좋아하고 안정적인 현실을 보장해 줄 수 있는 모순적 사랑을 선택한다. 나영규와 결혼함으로써. 그녀의 어머니와 이모는 같은 날 동시에 태어났지만 결혼 후 그녀들의 삶은 정 반대로 치달린다. 어머니는 가족에 대한 사랑을 폭력과 도박으로, 그리고 가출로 이어지는, 남편의 무책임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그를 측은하게 여긴다. 또 오랜 후에 치매를 달고 돌아온 그를 보살피며 감옥에 있는 아들 진모의 옥바라지를 하며 바쁘게 사는 것이, 그런 생활이 행복하다고 여긴다. 반면에 풍요로운 삶, 그러나 형식적인 부부 생활에서 오는 무미건조함에 말라버린 감정을 태우지 못하고 자살을 선택하는 이모.
사랑에 바닥이 안 보임에도 부부생활을 계속하는 자신의 모순적 태도가 싫어 새로운 삶을 택하는 사람도, 반면 자신의 겉과 속이 다르다는 것임을 인지하면서도 경제적으로 안정적이어서 자녀들을 위해서 부부의 연을 이어가는 이도. 꿈을 찾아 직장을 박차고 나와 도전에 나서는 사람도, 하는 수 없이 용기를 내지 못하고 현실에 굴복하는 이도. 36년 전에 빗물이 대지를 적신 그날 종로에서, 남자 친구를 뒤로 하고 내가 좋다고 용기 있는 고백을 했던 그녀도, 그날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주고 감정에 솔직하지 못한 채로, 지금은 없어진 강남 뉴욕제과 건너편 난다랑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던 날에 가지 않았던 나도.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지만 그녀가 너무 좋아 등을 보인 그녀의 마음을 되돌리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술에 허유적 거리며 떠나버린 그날 그 친구도. 자신이 그리는 이상과 현실 속에서 끊임없이 고민하며 최선을 다했던 시간에 그런대로 괜찮았다고 최소한의 가치 부여를 할 수 있다면, 그것도 어쩌면 행복했다는 방증이 아닐까.
설령 모순투성이의 일상이었을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