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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엽 May 31. 2023

고통 이기려고 상상하던 순간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 원제 MAN'S SEARCH FOR MEANING> 69쪽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그 말을 듣자, 아내 생각이 났다. 빙핀에 미끄러져 넘어지고 수없이 서로를 부축하고, 한 살마이 또 한 사람을 일으켜 세우면서 몇 마일을 비틀거리며 걷는 동안 우리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었다. 모두가 지금 아내 색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때때로 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별들이 하나둘씩 빛을 잃어 가고 아침을 알리는 연분홍빛이 짙은 먹구름 뒤에서 서서히 퍼져 가고 있었다. 하지만 내 머릿속은 온통 아내 모습뿐이었다. 나는 그녀의 모습을 아주 정확하게 머릿속으로 그렸다. 그녀가 대답하는 소리를 들었고, 그녀가 웃는 것을 보았다. 그녀의 진솔하면서도 용기를 주는 듯한 시선을 느꼈다. 실제든 아니든 그때 그녀의 모습은 이제 막 떠오르기 시작한 태양보다도 더 밝게 빛났다.

그때 한 가지 생각이 내 머리를 관통했다. 생애 처음으로 나는 그렇게 많은 시인들이 내 머리를 관통했다. 그렇게 많은 사상가들이 최고의 지혜라고 외쳤던 하나의 진리를 깨달았다. 그 진리는 바로 사랑이야말로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가장 궁극적이고 가장 숭고한 목표라는 것이었다. 나는 인간의 시와 사상과 믿음이 설파하는 숭고한 비밀의 의미를 간파했다. -인간에 대한 구원은 사랑을 통해서 , 사랑 안에서 실현된다."



죽음의 수용소라는 극한 상황에서 고통의 순간을 이겨내기 위해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는 아내를 생각하게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가혹한 현실로부터 빠져나와 내적인 풍요로움과 영적인 자유가 넘치는 세계로 도피할 수 있는 정신적 능력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같이 걸어가다고 수시로 무자비한 구타를 당하고, 함께 가던 사람이 눈앞에서 마구 죽어나가는 수용소에서 말이지요.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그런 급박한 상황에서도 아내를 생각하며 가혹한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정신적 노력이 인상적입니다. 막상 내가 그런 상황에 처하면 그런 여유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여기 지은이 빅터 프랭클 정도의 고통은 아니지만 제가 군 복무 중에 철야행군을 하면서 무척 고통스러울 때 어머니 모습을 많이 떠올렸습니다. 육군복무룰 한 대한민국 남성들은 잘 알겠지만 M60 기관총열을 소대별로 들고 가야 하는데, 각자 개인화기에 배낭이 있는데다가 기관총열을 추가하니 상당히 무겁습니다. 그래서 기관총열을 교대로 어깨에 매고 가지요. 대부분 1시간 아니면 2시간 정도 가면 교대를 합니다. 그런데 제 뒤 고참이 성질이 아주 고약하여 그야말로 지랄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몇 시간을 가도 기관총열을 받아주지 않습니다. 그나마 제가 시골에서 성장하여 덩치도 있고 힘도 센 편이라 그냥 그대로 버티고 걸었습니다. 발바닥이 찢어져 양말 속에서 고통이 전해져 옵니다. 총열이라도 뒤에서 받아주면 좋겠는데 죽을 맛이었습니다. 


그럴 때 고향에 계신 어머니를 떠올렸습니다. 빨리 휴가가서 어머니 모시고 저녁 식사를 맛있게 해야지. 밀린 농삿일이라도 있으면 어머니는 하지 마시라 말리고 내가 다해서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려야지, 군입대 전처럼 어머니 곁에 나란히 아니면 마주 앉아 옛날 이야기를 해드려야지. 평생 저만 바라보고 사셨던 우리 어머니를 어떻게든 기쁘게 호강시켜드려야지 등등 혼자 마음속으로 어머니를 그리고 또 그렸습니다. 상상 속에서 그렇게 한참 걸었더니 저 뒤에서 큰 소리가 들려옵니다. 고향 대구 출신의 인정 많은 고참의 큰 목소리입니다. 


"야! 총열이 왜 안 넘어오노? 오른쪽엔 벌써 내 옆  바로 요까지 왔는데 왼쪽 우리줄은 누가 개기고 해서 안 넘어오노? 빨리 교대 받아라. 어잉~"


그 말이 떨어지쟈 홋떡집에 불난 듯 소란이 벌어집니다. 제 바로 뒤에 따라오던 성질 더러운 고참도 대구 고향 출신 고참보다 짠밥이 적아서 마지못해 제 총열을 받아듭니다. 솔직히 그 순간은 어머니 생각으로 크게 힘들지 않았었지요. 어쨌든 뒤에서 받아주어 몸이 훨씬 가볍더군요. 아까까지는 그리 밉더니만 막상 이렇게 총열을 받아주니 '감사합니다.'란 말이 마음 속으로 마구 터져나왔습니다. 그렇게 걸어가다 "10분간 휴식"하는 순간에 모두들 배낭을 진 채로 길 가 양쪽으로 누워버립니다. 그리고 순식간에 담뱃불 행렬이 거대한 불꽃놀이로 보입니다. 저는 담배를 전혀 피우지 않았기에 다른 병사들의 담배 피는 모습을 바라볼 뿐입니다. 발바닥이 아리고 쓰려 좀 힘들었지만 견딜만 했습니다. 그 짦은 순간 10분 동안 배낭을 등지고 바닥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니 원 세상에 무슨 별이 그렇게 많이 떠 있던지요. 다시 어머니 생각을 떠올렸습니다. 


"어머니, 조금 있으면 휴가 갑니다. 농삿일 너무 서두르지 마시고 제 갈 때까지 그냥 두셔도 되요. 제가 휴가가면 어머니는 그냥 계시고 제가 다 할게요. 형도 열심히 하고 있겠지만, 제가 휴가 가서 모두 해놓고 오고 싶어요. 휴가가서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고 훗날 전역하면 진짜 어머니를 위해 제 모든 것을 다 바쳐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어머니 제가 갈 때까지 건강하게 계세요. 이번에 휴가 가면 제가 좋아하는 떡을 어머니와 논공 돌끼장에 가서 함께 사오고 싶고요. 어머니 친구분이 하시는 가게에서 정구지 찌짐과 막걸리를 마시고 싶습니다. 아버지도 함께 가시면 더욱 좋겠지요. 친구 분을 밀어놓고 어머니가 해주시던 정구지 찌짐 두툼한 것을 안주 삼아 아버지와 막걸리를 대작했던 대학 1학년 때가 정말 그립습니다. 어머니 생각하면서 힘든 군대 생활 이겨낼 겁니다. 어머니 그리고"


"기상! 출발. 일어섯. 뭐 하나 소총 잘 챙기고, 담배 꽁초 잘 비비가 꺼라. 선두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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