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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엽 May 31. 2023

 나이가 들면  가끔 추억에 젖고

고목, 달밤 그리고 이별


토요일 낮 거실 너머 보이는 바다와 하늘이 맑게 다가옵니다. 약 40년 가까이 연락이 끊어졌던 고향 마을 옆  마을 친구와 전화 통화를 하였습니다. 그 친구도 평온한 삶을 살아가고 있고, 자제들도 각자 역할을 잘 하고 있다고 하니 우선 좋았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리 긴 세월 연락도 못 하고 살았을까 하면서 각자 자책도 합니다. 스무 살 그 젊은 시절 우리 마을과 옆 마을 친구들이 서로 얼굴을 알고 친하게 지내자고 이야기했던 일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대학 합격하던 스무 살 때 우리 마을에서 가설무대를 차려 '노래자랑대회'가 열렸습니다. 이웃 마을 사람들 대거 우리 마을 넓은 마당에 모였지요. 사회 잘 하던 태수 형님의 입담이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안 씩실, 원뜽, 고개만데이, 바깥 씩실, 상동, 하동, 삼대, 기족 등 여러 마을에 노래 잘 하는 사람들이 모였고, 대부분 우리들이 아는 노래여서 함께 합창하면서 응원을 보냅니다. 아무래도 우리 동네가 본거지라 홈 이점을 안고 들어가기에 응원부대가 다른 동네들 전부 합친 것돠 두어 배 많았습니다.

남진의 " 오 그대여 변치 마오~~~~.", 나훈아 노래 아니면 오래 전에 흘러간 노래 조미미의 '서산갯마을'이 나오면 여자애들이 유난히 낭랑한 목소리로 함께 불렀습니다. 전 '서산갯마을'은 제목은 들었지만 노래는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각 동네에서 몰려 온 여자에들이 합창하는 모습은 보기 좋았습니다. 당시만 해도 시골 고향 마을엔 어린, 젊은 사람들이 정말 많았습니다. 정겹고 행복한 그 시절 생각만 해도 코끝이 시큰해지고 아련한 추억으로 다가옵니다. 모두 살아 있어서 그 순간을 한번이라도 재현할 수 있다면.


노래자랑대회이기에 마을 대항 성격이 강했습니다. 모두 자기 동네 출신이 일등하기 빌었고, 우리 마을에선 노래도 잘 하고 얼굴도 예뻤던 '신숙 누나'가 거의 아이돌 급이었습니다. 노래는 아주 오래 전 가요무대에 나올 만한 곡이었지만 말이지요.


"다음은 위천 우리 본동의 강신숙 씨 순서입니다. 크게 박수로 환영해 주세요. 노래 곡목은 ~~~~"

사회자의 소개에 맞춰 신숙 누나가 무대에 오르면서 우리 응원부대쪽으로 크게 손을 흔들고 환하게 웃어주었지요. 노래 곡목은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데 노래 내용은 "아아 강릉에 경포대는 아아 김진사의 놀이터냐~~~~" 부분은 40여 년이 넘어고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신숙이 누나가 몇 등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은데, 시상품은 생각납니다. '다라이 두 개, 삽"


그렇게 마을 노래자랑대회가 열띠게 진행되던 순간 바로 옆마을 상동에서 또래들 일곱 여덟 명 정도가 누군가의 소개로 저와 인사를 나누게 되었고 우린 스무 살 이후부터 찐한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중에 한 명은 저와 같은 대학에 합격한 동기생이네요. 전공 과가 달랐지만.  그때부터 인연이 되어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연락을 주고 받았습니다. 이번에 정말 오랜만에 통화한 친구가


"야~야! 니 종규 딸래미 치울 때 올 끼제? 느그들은 대학이 같아서 계속 연락하고 지냈다메? 이번에 오면 만나 밥이라도 한 끼 하자. 잔치하는 집에서 먹는 거는 먹는 거고 우리 친구들하고 오랜만에 한번 보자. 알았제."


하기야 대학 동기인 혼주로부터 오래 전에 딸 혼사 청첩장을 받았으니 미리 알고 있었지요. 어쨌든 대학 동기인 친구를 제외하고 지금 40여 년 만에 통화하는 이 친구가 그래도 각별했습니다. 다시 한번 대구에서 고향 친구 딸 혼사에서 꼭 만나자고 하면서 한 마디 보탭니다.


"어쩌면 우리 친척들이 많이 올 거니까. 니 생각해서 아마 가~가 00도 초청할 거다. 어쩌면 올지 모른다."


그리 안 해도 제가 참석하겠지만. 아득한 세월 너머 그녀가 온다면 갈 이유가 더 생긴 것 같았습니다. ㅎㅎ



00! 참으로 오랜 세월입니다. 열 일곱 살 때 수박 밭에서 만나 서로 눈이 맞았던 여학생도 그 마을 사람입니다. 고1때 얼굴을 알았지만, 어떻게 연락이 제대로 되지 않고 그만 스무 두 살까지 만나지도 못하고 그렇게 시간을 보냈지요. 편지를 보내도 답장이 없고, 오토바이 타고 그 마을 그 여학생 집 담 너머로 바라보기만 하고 돌아오기도 했는데, 지나고 생각하니 모두 추억이 되었네요. 뒤에 알았는데 그집 오빠가 방해를 했더군요. 제가 보낸 편지가 도착하는 족족 가위로 잘라 부엌에 태워버렸다는군요. 참 나쁜 00.



스무 두 살 군입대를 사흘 앞두고 저희 집에서 친구들, 선후배들 약 40여 명 정도가 마당에 모여 송별식을 하였습니다. 전혀 생각지도 않았는데 오래 전 추억의 그 여학생이 제 군입대 송별회 하는 것을 어찌 알고 우리 마을 우리 집에 찾아왔습니다. 그녀는 낮에 미리 저희 집에 와서 어머니를 만났던 모양입니다. 송별식은 밤에 진행되었고, 전 그날 오후까지 들에서 농사일을 도왔습니다. 오후 늦게 집에 왔는데, 마침 그 여학생을 만났지요. 5년만에 만나서 반갑긴 하였지만, 사흘 뒤 입대일이라 안타까웠습니다. 어머니께서 그 여학생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입니다.


"야~야, 아까 낮에 저짜~ 상동에서 색시 하나가 왔더라. 이야기를 나누다 보이 000씨 집 딸래미더라. 그 집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이름은 들어본 양반이데. 그라고 있제, 그 색씨 진짜 참하데. 니 그래 참한 색시 지금까지 내 한테 말도 안 하고 와 그랬노? 니도 참 그렇데이. 인자 내일 모레 군에 갈 낀데 지금까지 뭐 한다꼬 만나도 몬하고 오늘에사 그리 왔다 카더노. 니 그 색시하고 앞으로 항시 만나믄 안 되나, 색씨 진짜 곱더레이."
"엄마 그기 아이고, 고등학교 1학년 때 우리 수박밭에서 엄마, 아버지 일 도울 때 그때 알았던 여학생이다. 그때 이후로 몬 봤다. 어떻게 하다 보이 연락이 끊킨네. 인자 3일 뒤믄 군에 가야 하는데, 왜 지금 찾아와서 그라는지 몰라."
"야~야, 어쨌든 집에 찾아온 손님한테 너무 쌀쌀케 대하지 마래이. 난 그 색씨 참말로 참하던데. 우째 앞으로 만나믄 안 되겠나."
"그 정도 사이가 아이다. 앞으로 만날 일이 별로 없을 끼다. 엄마 마음에 들었다 카이 그건 괜찮네. 우리집 둘째 며느리는 내가 군 제대하고, 대학 졸업하고 취직하믄 진짜 괜찮은 아~ 하나 데리고 오께. 엄마 앞에 딱 앉혀 놓고 인사 시켜주께. 지금은 당장 군에 가야 한다 아이가. 엄마가 암만 그 아~ 이쁘다 캐도 어쩔 수 없다 아이가. "
"그래도 그 색씨 진짜 참하던데, 곱고 착하고 말도 이쁘고 거~다가 옷은 또 얼마나 이쁘게 입고 왔는지......"



옅은 분홍빛 투 피스를 곱게 입고 입대  사흘 전에 찾아온 그 여학생과 함께 인근 시골 다방으로 가서 잠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아쉽지만 이젠 돌아가야 한다고 제가 말했지요. 군 입대하는 입장에서 책임지지 못할 것 같아 미안하다. 이렇게 찾아주어 고맙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 등등으로 말을 건넸지요. 다방 주인은 아는 지인의 부인이라 미소를 띠면서 살짝 살짝 눈치를 자꾸 주시던 기억도 생생합니다.



그녀는 낮에 우리집에 미리 와서 어머니를 만나 잠시 대화를 나누다가 오후 내내 여고 동기인 제 사촌 집에서 함께 있었습니다. 외갓집이 우리 마을에서 윗쪽으로 있었고, 그집 딸 그러니까 외사촌이 당시 현풍여고에 다녀 둘이 같은 반이었다고 하네요. 사촌이 그녀에게 일러주었다고 하더군요.


"있다 아이가. 우리 사촌 대구에서 학교 다니거든. 가~가 여~서 학교 다닐 적에도 집안 일 정말 많이 도우고 그랬거든. 마을에서도 일도 잘 하고 공부도 잘한다고 칭찬이 진짜 많대이. 무엇보다 즈그 엄마한테 지극정성이다 아이가. 즈그 엄마가 바로 우리 고모고. 고모는 가~ 하나만 믿고 산다 아이가. 수박밭에 가면 여름 방학이라고 가~가 와 있을 끼다. 수박 사러 가는 길에 한번 보면 되겠네."


그렇게 여고 1학년 때 우리 수박밭에 수박을 사러 왔고, 원두막에 진열된 수박을 하나 들고 그녀 어머니가 일하는 밭까지 들어주며 인연이 되었지요. 따가운 햇살이 마구 내리 쬐는 낙동강변 둑길로 교련복 하의에 하얀 메리야스 런닝을 입은 고교생이 커다란 수박 하나를 가슴에 소중하게 끌어안고 앞으로 걸어가고 여학생은 뒤따라 오면서 이것 저것 물어봅니다. 원두막에 남아 있는 친구들 후배들은 멀리서 응원의 함성을 보내고, 저는 쑥스러워 하늘 한번 낙동강물 한번 번갈아 바라봅니다. 어쩌다 강 건너 마을 삼대와 더 먼 마을 오실 나루터를 보면서 그 소녀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기 빌었지요. 제가 정신이 없어서 뭐라고 답했는지도 기억이 전혀 없습니다. 얼마나 얼어 붙었는지 수박 값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 사연이 동네에 소문이 퍼져 한 동안 아지매들의 놀림감이 되었지요. ㅎㅎ.


다방에서 짧은 시간 대화를 나누고 오토바이 뒤에 태워 그 마을로 달렸습니다. 우리 마을에서 거기까지는 짧은 거리입니다. 여학생은 처음엔 쭈뼛 쭈뼛하다가 뒤에 올라타더니 제 허리를 세게 잡았습니다. 저도 처음엔 어색했습니다. 제 온몸이 사후경직처럼 굳어 버립니다. 그렇다고 손을 놓으라든지 살짝 잡으라고 할 수도 없었습니다. 비포장도로를 달려가야 하니까 오토바이가 많이 흔들리고 해서 그냥 그렇게 갔습니다. 지금도 제 등 뒤에 자신의 볼을 댄 채 제 허리를 꼭 잡은 그 여학생이 했던 말이 생생합니다.


"지금 이렇게 가지만, 오늘 이 순간은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 같아요. "


© nitish007, 출처 Unsplash


그것이 오토바이 주행 중에 유일한 대화였습니다. 저는 그냥 "......"였습니다. 뭐라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을 입구에 들어서니 고목나무가 우리를 반겨줍니다. 달밤입니다. 어수룩한 달이 흐릿하게 보였지요. 고목나무를 지나 가게 앞에  그 여학생을 내려 주었습니다. 그때 그 마을 친구들이 막걸리를 마시고 있다가 저희 둘을 보더니 당장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하지 하면서 둘이 그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마주 앉았습니다. 얼굴을 제대로 보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제 평생 그 순간이 그녀 얼굴을 가장 제대로 오래 본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 마을 친구들이 제 군입대 소식을 알고서 노래를 불러주었습니다. 당시에 군입대를 앞두고 유행처럼 불렀던 노래가 "전선야곡"이었습니다. "가~랑 잎이 휘날리는 전선의 다알밤~ 소리없이 내리던 이슬도 차가운데~"


저와 여학생은 그냥 그 노래를 듣기만 했습니다. 그냥 막걸리 잔만 연거푸 마십니다. 할 말이 없습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좀 자주 만날 것을. 내가 좀더 용기를 내어 그녀 집 대문으로 들어가서 인사라도 할 것을, 바보같이 그집 대문밖에 서서 담 넘어로 그녀와 어머니의 실루엣만 보고 돌아오던 때도 떠올랐습니다. 참 바보같이. 우리 마을에서 그녀 집까지 오토바이로 15분 정도만 충분한 것을. 오토바이 처음 사가지고 고령으로 현풍으로 성산으로 득성으로 그리 쏘다니면서 정작 그녀 집은 그렇게나 조심하기만 하고. 바보같이.  



그녀도 막걸리 한두 잔을 마십니다. 둘다 말이 없고 그냥 웃기만 하였지요. 웃어도 웃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 마을 친구들을 뒤로 하고 둘은 가게 밖으로 나왔습니다. 이 글 첫 부분에 언급한 친구도 나왔습니다. 그 친구가 당시 유난히 저에게 살갑게 대했습니다. 그래서 그 마을 친구 중에는 지금도 가장 생각이 많이 납니다.



"야! 느그 둘이 언제부터 사귀고 했노. 우린 새카맣게 몰랐네. 가시나 니는 엉쿰하이 와 이런 거 우리한테 안 알려 좋노. 니도 그렇다 진작 우리한테 갈챠 줬으면 오늘 우리 야 데리고 항쿤에 느그집에 갈 꺼 아이가. 느그 둘 다 휴가하고 제대할 때까지 마음 변하지 말고 잘 사귀라이. 그라고 니 조심해서 다녀 온네이. 우리 동네 아~들은 전부 방위로 가니까, 니가 진짜 고생 많겠다. 휴가오면 보자 잘 다녀온네이." 하면서 악수를 굳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친구는 가게 안으로 들어가고 우리 둘은 마을을 걸어나옵니다.



고목 나무 아래에서 그 여학생은 나란히 섰습니다. 가느다란 달밤이 고목나무 가지 사이로 곱게 새어나옵니다. 여린 달밤이지만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나란히 섰다가 어느 새 제가 그 여학생을 지나쳐 천천히 걸었습니다. 그리고 한참 걸어나왔다고 생각해서 돌아보니까 그 여학생이 고목 나무 아래서 하염없이 손만 흔들고 있습니다. 달밤이라도 고목 나무 아래에 있어서 얼굴이 제대로 보이진 않지만 손을 흔드는 모습은 역력합니다.   



© robmulally, 출처 Unsplash



다시 바라보니 달빛이 희미하지만 여학생의 손짓이 눈에 계속 들어옵니다. 무슨 말이라도 했어야 하는데, 둘 다 아무 말도 못하고 헤어집니다. 그리고 오토바이에 올라 그냥 달렸습니다. 마을 어귀를 거의 벗어나서 큰길 가에 오토바이를 세우고 다시 그 마을을 바라봅니다. 여학생은 그때까지도 서 있었습니다. 제가 두 손을 원형으로 크게 휘저으며 이별을 고했습니다. 그렇게 헤어지고 지금까지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림 같은 이별이었지요.



40년 가까이 연락이 두절되었다가 어제 전화 통화를 한 그 친구도 여학생과의 사연을 잘 알고 있을 터인데도 둘 모두 그것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습니다. 연말에 고향 친구의 혼사가 있을 예정이라 그때 반드시 참석하라고 해서 꼭 가겠노라고 약속하였습니다. 세월이 이렇게 빨리 흘러가는데, 만날 기회가 있을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이번에 고향 마을에서 만나지 못하면 또 언제 만날 수 있을까요. 전화 통화도 40년 걸렸는데, 직접 만날 기회는 더욱 드물어지겠지요. 올 연말에 결혼식장에서 만날 얼굴들이 꽤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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