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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엽 Jun 04. 2023

"가지 마이소 한창 따고 있는데"

7외부 강의한 강사료가 들어왔습니다. 퇴직 후 연금은 모두 아내가 쓰게 하고 나머지 제가 벌어들이는 돈은 오롯이 제가 쓰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아내도 그 돈에 대해 묻지도 않습니다. 물으면 곤란하지요. ㅎㅎ. 하지만 예전에는 가끔 두손을 활짝 벌려


"봉투 봉투 벌렸네. 여보 돈이 좀 필요한데."


그러면 저는 마음 속으로


'아니 연금도 통째로 다 쓰면서 또 나한테 돈을 요구하나'라고 생각하다가 수중에 든 돈을 내놓습니다. 아내가 기뻐하는 모습 자체가 좋아서 그렇게 합니다. 그렇다고 큰 돈도 아니고 해서 별 부담이 되지 않지요. 돈 액수를 떠나서 아내가 기뻐하니 저도 그냥 기쁜 마음으로 줍니다. 그리고 한 마디 합니다.


"인자 다시는 안 준대이. 다음엔 없대이."라고 하지만, 다음에 또 그렇게 달라고 하면 버틸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ㅎㅎ. 하긴 요즘엔 아내가 몸이 불편해서 만사가 귀찮은 탓인지 그렇게 돈을 달라는 말을 거의 하지 않더군요. 외부 강의한 돈이 들어오면 특별히 쓸 데가 없어서 그냥 통장에 둡니다. 언젠가는 아내가 손을 벌릴 것을 대비해야지요. ㅎㅎ. 참 일전에 가방 비싼 것을 사주겠노라고 호기를 부려서 준비해야 하겠네요. 괜히 약속하고선.


이번에 수강료가 들어갔다는 담당자의 문자를 받고 편의점에 가서 바나나 우유 여러 개와 근처 마을 카페에서 산 빵을 들고 아파트 경로당에 들렀습니다. 대여섯 분이 둘러앉아 열심히 화투를 치고 있다가 저를 반겨 줍니다.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들러 먹거리를 내놓았기에 제가 들어가면 매우 반갑게 대해줍니다. 제가 그랬지요.


"이거 드시면서 해야 힘이 나 돈을 따실 거니까 드십시오."

"이렇게 자꾸 갖다 주면 집 살림에 기스[상처]가 나니 인자 그만 가오이소. 한두 번도 아이고 이렇게나 자주 갖다 주이 참말로 고맙심더."


제가 말했습니다.


"이렇게 화투 치면 손에 뭐가 묻을 거니 손을 꼭 씻고 드세요. 별 거 아니니 너무 그렇게 크게 생각하시지 마시고요."


모두 큰소리로 "잘 먹겠습니다." 라고 답합니다. 제가 옆에 잠깐 앉아 구경합니다. 저는 화투를 절대 치지 않습니다.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살아 생전에 도박을 하도 많이 해서 저는 절대로 화투는 손에 들지 않겠다고 굳게 맹세하였기 때문이지요. 모두 손놀림이 재빠릅니다. 몸 동작도 능숙합니다. 이래서 건강한가 봅니다.


제 옆에 계신 분은 올해 93세라고 하셔서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저쪽 할머니 앞에 아무 것도 안 보여서 이분앞에 있는 바나나 우유를 들어 전해 주려고 하니까 93세 이분께서 얼른 바나나 우유를 제게서 뺏어 들고 이마까지 숙여 가면서

 

"이건 제 꺼라예. 가~가믄 안 되예. 저짝은 아까 받아가 아래 놔났다 아입니꺼. 이껀 제 꺼라예."


아이구 93세 할머니가 말씀도 또박또박하고 화투 패 돌리는 몸짓이 대단합니다. 신기할 정도입니다. 각자의 통에는 10원 짜리가 가득 가득 모여 있습니다. 점수 계산도 정말 빠릅니다. 이렇게 화투만 같이 쳐도 재미있는가 봅니다. 저는 솔직히 화투에 관심도 재미도 없더군요. 잠깐 그분들 사이에 앉아 이야기를 들어주기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일어서니까 93세 할머니가 고운 미소를 띤 채 제 팔을 딱 잡습니다.


"가지 마이소. 거~쪽이 계시가~ 한참 따고 있는데."


모두 폭소를 터뜨립니다. 그래서 제가 일어서려다가 그냥 앉았습니다. 93세 할머니 가만히 보니까 나이에 비해 동그란 눈에 미소도 백만 불 짜리입니다. 무엇보다 그 나이에 그렇게 건강하실 수 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옆에 계신 할머니들은 나이가 10년 이상 적은데도 큰 차이를 못 느끼겠더라고요.


"인자 가실라 카는데, 그리 자꾸 붙잡으마 우짜자꼬 그라능교. 안 그래도 바쁘신 양반인데 이리 와서 말동무도 해주고 묵을 껏도 사다주시니 참말로 고마운 분인데. 인자 그만 보내 주이소."


그러자 93세 할머니 살짝 웃으십니다. 세상에 웃는 것도 어찌 그리 조용하고 고우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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