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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엽 Jun 17. 2023

어딜 가세요?

우리집 3남매 모인 날 현관에서

토요일 낮 참으로 오랜만에 오전 시간에 집안에서 휴식 시간을 갖고 있는데, 딸 아이가 평소와 달리 살짝 꾸미고 나서더니 아주 상냥한 표정으로 저에게 물어 옵니다.


"아빠, 지금 어디 가세요?"


어딜 갈 계획이 없었는데, 갑자기 딸아이가 물어오니 뭔가 부탁하려나 하는 생각이 들어옵니다. ㅎㅎ. 딸 아이가 토요일 오전에 이렇게 물어 온 경우가 별로 없었지요. 마침 아내가 오전 11시에 미용실 예약이 되어 있다고 하네요. 집에서 걸어가면 5분도 채 걸리지 않은 그야말로 지척이지만 낮 햇살이 너무 뜨거우니 태워달라고 하네요. 실제로 아내는 몸 상태가 썩 좋은 편이 아니기 때문에 걷는 것도 부담을 느끼지요. 그래도 집에서 나서서 조금만 걸어가면 될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만 기꺼이 태워주기로 합니다. 


그리고 딸 아이도 함께 차에 탑니다. 어딜 가느냐고 했더니 그냥 미소만 짓네요.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남포동까지 태워 줄까? 오늘 무슨 좋은 일이 있는가 보네. 우리 착한 딸."


딸 아이도 미용실 간다네요. 아들 두 녀석과 달리, 딸 아이와의 대화는 말투 자체가 완전히 다릅니다. 딸 아이는 조금이라도 아이에게 신경쓰지 않게 하려고 조심 조심 말을 건네지요. 평소에도 딸 아이가 뭔가 부탁하면 그 모든 것을 다 들어주겠노라고 생각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왜 '딸 바보'라는 말을 만든 것인지 깊이 실감합니다. 제가 보기엔 세상에서 제일 착하고 순한 우리 딸입니다. 아내를 내려놓고 곧장 남포동까지 달려갑니다.


차창을 스쳐가는 바깥 바다 풍경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푸른 바다와 하늘 그리고 하얀 구름들 한 폭의 그림입니다. 딸 아이는 말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오늘은 오히려 제가 말을 먼저 하고 아이는 들어주면서 맞장구쳐 주는 정도입니다. 딸 아이가 저에게 그냥 어디 가느냐고 물었을 뿐인데, 이렇게 남포동까지 함께 드라이브를 합니다. 학창 시절을 빼놓고는 이렇게 단 둘이 차를 함께 타고 가는 일이 정말 오랜간만이네요. 아이도 시내 가는 것이 즐거운가 봅니다. 그리고 둘의 대화 도중에 제 노후 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답했습니다. 


"원래는 퇴직 직후 시골로 낙향하여 은거하려고 했어. 도시를 떠나 이젠 조용하고 편하게 보내려고 마음 먹었지. 그런데 엄마가 코로나 2차 접종 후유증으로 저리 고생하는데, 환자를 집에 놓고 나 하나 편하게 살려고 하는 것은 사람 도리가 아니라 싶어서 시골로 가겠다는 꿈은 접었지. 훗날 내가 먼저 죽으면 어쩔 수 없지만, 만에 하나 엄마가 먼저 세상을 떠나면 그 즉시 아파트를 팔아서 너희들 3남매에게 균등하게 배분한 뒤 난 그길로 시골 아주 깊숙한 마을로 들어가 살 거 같아. 세상 사람과는 인연을 딱 끊고 독서와 집필을 하며 자연 속에서 천천히 지내다가 그렇게 가고 싶다. 진짜 그렇게 전개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내 마음은 그렇다.



아이들 3남매 신발이 나란히 놓인 것만 봐도 기분이 참으로 묘해집니다. 세 아이 모두 저와 아내에게 지극정성으로 효도하기에 정말 세상 어디 내놓아도 모자라지 않습니다. 하지만 셋이 35,34,31세로 그야말로 혼기가 꽉 찼는데, 아무도 결혼한다는 말이 없네요. 얼른 얼른 결혼해서 집을 떠나가야 저와 아내로선 부모 도리를 다할 듯한데, 그렇다고 결혼을 강요할 수는 없지요. 


"자식들에게 조금도 짐이 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하거든. 병들어 죽더라도 그냥 알리지 않고 조용히 혼자 세상을 떠날 거야."


우리네 삶이 제 맘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은 짧은 시간에 딸 아이에게 제 속마음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러자 딸 아이는 시골 생활이 겉으로 보기엔 낭만적일지 몰라도 의료 시설을 비롯한 각종 편의 시설 부족으로 그곳에서 살기엔 매우 부족함을 들어 제 계획을 살짝 반대하는 말을 해줍니다. 제가 시골에 들어가서 어디 편하려고 그리 하겠습니까.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도 그냥 그 생활에 젖어 살고 싶었기 때문이지요. 우리집 아이들 성품으로는 제 계획을 그대로 수용할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몰래 떠날 생각이지요. 


아이들 어릴 때는 대화를 할 기회도 시간도 많았는데, 이제 아이들이 성인이 되고 보니 그렇게 여유있게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잘 없네요.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네 인생인가 봅니다. 아이들도 한참 바쁜 삶의 현장에서 정신없이 살아가고 있기에 이해는 되지만 가끔은 아쉬울 때도 있습니다. 언제 한번 다섯이 함께 모여 어디 여행이라도 가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보지만 아직까지는 언감생심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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