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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엽 Jun 19. 2023

니 몰라서 그캤제 느그 엄마가 아부지 더 좋아했데이

세월이 흘러 흘러 어느 아지매가 들려준 어머니 아버지 살아 생전 이야기

코로나가 본격적으로 몰아치기 전 그러니까 지금부터 5년 전쯤에 고향 마을을 찾았을 때 이야기입니다. 아지매 세대들은 거의 다 돌아가시거나 살아 계신다 해도 대부분 요양병원에 가 계셨지요. 그중에 김천띠기 아지매는 성격이 아주 명랑하시고 아재랑 함께 사셔서 그랬는지 몰라도 그때까지 비교적 건강하셨지요. 그래서 마을에 들어가면 회관에 들러 인사를 드리고 마을 집들을 하나 하나 둘러보다가 김천띠기 아지매 댁까지 갔었지요. 마을회관은 형수님들로 세대교체되어 있었습니다.


"아이구 야~ 야, 니 왔나. 부산서 잘 살고 있제, 아~들은? 아 엄마는? 아파트는 하나 장만했졔? 어디 아픈 데는 없나?"


숱한 질문이 그야말로 따발총처럼 쏟아집니다. 마루에 앉아 아재의 건강은 어떤지 물었습니다. 다행히도 그때까지는 괜찮았지요. 그집 자제들 근황도 들었습니다.


"이 요만하이 째맨할 때는 덩치도 작고 힘도 없어서 뭐하겠노 싶었디, 이제사 보이 장골이 다 됐네. 느그 마느래가 잘 믹여서 그랬제. 하기사 느그 마느래도 본 적이 오래 됐지만, 그때 왔을 때 동그라이 해가지고 얼굴도 참했제. 마느래하고 아~들 잘 있지러."


대구 달성 사투리가 마구 달려나옵니다. 제가 몇 마디 대답하면 아지매는 그 몇 배의 말을 질문으로 승화시킵니다.ㅎㅎ


"있다 아이가. 니 알랄 때 느그 아부지가 좀 유식하다고 느그 엄마 학교도 몬 간 거를 좀 무시한 적이 있을 때 니가 나서가 느그 엄마 핀 들어준 거가 갑자기 생각나네. 니는 얼랄 때부터 참 똑똑했지. 부모에게 효도 잘 하고 마을 어른들한테 또 얼마나 공손했더노. 이리 성공해가 오이 진짜 고맙긴 한데, 우짜노 느그 엄마가 있으마 진짜 좋았을 낀데."


그렇게 말을 이어나가다가 김천띠기 아지매의 목소리가 점차 잠깁니다. 갑자기 목이 매인 듯 말을 잇지 못합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마을 아지매들과 정말 친했지요. 우리집이 가난해도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려는 아지매들, 돈이 급히 필요하면 어머니를 찾아왔던 형수님들은 지금도 그 시절을 떠올리며 돌아가신 저의 어머니에 대한 감사의 말을 하시지요. 김친띠기 아지매의 목소리가 좀 잦아지나 싶었는데 수건에 얼굴을 묻고 가만히 계십니다. 그리고 고개를 드는데 눈가가 그렁그렁합니다.


"아지매도 세상 베릴라 카마 니 잘 되는 거 보고 갔으마 좋을 낀데 무슨 그리 바빠서 그리 빨리 갔나 몰라. 느그 엄마 그렇게 가고 나이 동네에 누구랑 이야기할 사람도 없고 하소연도 못하고 진짜 답답했다 아이가. 느그 엄마가 학교 문턱엔 가보지 않았어도 정말 아는 기 많았고 경우를 그렇게나 따졌지. 그라니까 니가 이리 잘 됐다 아이가. "


제가 뭘 잘 되었다는 뜻인지 도무지 이해는 되지 않지만 아지매는 짦은 시간에 돌아가신 저의 어머니와 있었던 에피소드들을 들려줍니다.


"있다 아이가. 니 느그 아부지가 느그 엄마를 마구 몰아세우며 뭐라 칼 때 느그 엄마가 어디 갈 데가 있어야지. 그럴 때 니 공부하는 방으로 들어가면 느그 아부지 엄마 싸우는 것을 눈치채고 니가 문앞에 떡 버티고 서 있었다 아이가. 그라마 느그 아부지 아무 말도 몬하고 마실로 나갔다고 하대. 그런 소문이 많았지. 니는 그거 알고 있었나."


"그렇지요. 한번은 밤늦게 책 보다 변소 가는데 아버지가 어머니 보고 뭔가 뭐라 카는 말이 들리기에 살짝 들어보이 어머니가 일방적으로 혼나는 듯했지요. 아무 말도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는 저도 그냥 참고 다시 방으로 돌아왔지예. 어른 부부 싸움에 제가 끼드는 기 좀 그렇데예.  그런데 공부도 안 되고 잠도 안 오고. 무슨 가장이 자신 부인을 저렇게 몰아세우는지 도통 이해도 되지 않고. 결혼했으면 책임을 다해야 가장이지 하는 반감이 마이 생겼지요. 그 뒤부터 어머니가 제 방에 들어오시면 자동적으로 방문 앞에 떡 버티고 섰고 그때마다 아버지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대문 밖으로 나갔습니다. 저는 그때 그렇게 어머니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컸습니더. 제 덩치가 커서 그럴 수 있었겠지예."


아버지가 어떤 경우든 어머니를 무시하거나 일방적으로 훈계하는 듯하는 모습을 보이면 제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어머니 편을 들었습니다. 그때는 정말 제가 잘 하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가서 지금 돌아보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더군요. 우리집 큰아들이 저에게 그렇게 한다면 제가 얼마나 당혹할까요.


말 끝에 김천띠기 아지매가 이렇게 말했지요.


"니 몰라서 그캤제. 느그 엄마가 느그 아버지 더 좋아했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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