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길엽 Jun 29. 2023

거기부정(擧棋不定)

일에 명확한 방침이 없다. 우유부단하다. 

거기부정(擧棋不定)이란 말이 있습니다. 바둑에서 돌을 쥐긴 했으나 어디에 놓으면 좋을지 정해지지 않은 것을 뜻합니다. 바둑에서 어디 둘지 분명하지 않은 것처럼 일을 하는데 명확한 방침이 없다는 뜻으로 많이 언급되지요. 또는 바둑을 두는데 포석(布石)할 자리를 정하지 못하고 둔다면 한 집도 이기기 어렵다는 뜻으로 확고(確固)한 주관(主觀)이 없거나 계획이 수시(隨時)로 바뀜을 이르는 말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양공(襄公) 25년 조(條)에 나옵니다. 춘추나 노나라 사서(史書)이기에 노나라 양공 시절 기록이지요. 




  -열국지(58) 위(衛)나라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에서 일부 발췌 인용. 



위(衛)나라 헌공(獻公)은 폭군이었습니다. 위헌공은 위정공(衛定公)의 아들로서 군위에 오른 이래 군주다운 모습을 보인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가까이하는 인물이라곤 모략을 일삼고 아첨하는 데 능란한 자들뿐이었습니다. 나라일에 신경 쓰기보다는 음악과 수렵에 정신을 빼앗겼습니다. 여기서 음악이라 함은 고상한 음악이 아닙니다. 위나라 음악은 위풍(衛風)이라 불리는 것으로, 음탕하기로 소문이 났습니다. 이런 임금을 조정 신료들이 믿고 따를 리 없었지요.

 

"악(樂)을 멀리하고, 예(禮)를 가까이 하시오."

 위헌공의 생모인 정강(定姜)은 아들이 군주자리를 지키지 못할까 염려하여 누누이 훈계했으나, 위헌공(衛獻公)은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한번은 위헌공(衛獻公)이 대부 손림보와 영식에게 며칠 뒤 점심 식사를 하자고 약속했습니다. 약속한 날이 되어 손림보(孫林父)와 영식(寧殖)은 예복을 차려입고 공궁으로 들어가 위헌공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점심 때가 지났는데도 위헌공(衛獻公)으로부터 아무런 기별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알고보니 주공 위헌공이 약속을 잊어 버리고 후원 동산에서 활을 쏘고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안 손림보(孫林父)와 영식(寧殖)은 노기가 치밀었으나 눌러 참고 후원동산으로 향했습니다.

 

과연 후원에서는 위헌공(衛獻公)이 사사 공손정(公孫丁)을 데리고 활쏘기 내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사사(射師)란 궁술 스승이라는 뜻입니다. 공손정은 위나라에서 명궁으로 소문난 사람으로 많은 제자를 배출해냈습니다. 위헌공도 틈만 나면 공손정을 불러 활쏘기를 배웠지요. 위헌공(衛獻公)은 활쏘기에 빠져 있었음인지 손림보와 영식을 보고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더욱 화가 난 손림보(孫林父)가 위헌공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주공!"

그제야 위헌공은 눈을 거만스럽게 치켜 뜨며 귀찮다는 표정으로 물었습니다.

"그대들은 무슨 일로 왔는가?"

"주공께선 신(臣)들과 점심식사를 하자던 약속을 잊으셨습니까? 신들은 지금까지 내궁 밖에서 기다리다 못 해 들어왔습니다."

"어, 그런가? 내가 활 쏘는 일에 정신이 팔려 그 약속을 잊었구려. 그대들은 물러가라. 다음 날 다시 약속하리다."

 

손림보(孫林父)와 영식(寧殖)은 심한 모욕감을 느꼈습니다. 두 사람은 걸으면서 탄식합니다.

 "주공이 노는 데만 정신이 팔려 대신들을 길가에 떨어진 말똥보다 하찮게 여기는구려. 장차 우리들에게 어떤 불행이 닥칠지 모르겠소."


 "임금이 무도(無道)하면 스스로 재앙을 받게 마련이오. 그가 어찌 남을 불행하게 하겠소?"

"선군의 동생인 흑배(黑背)의 아들 공손표(公孫剽)가 사람됨이 어질어 능히 성군의 자질을 갖추고 있소. 그대 뜻은 어떠하오?"      -열국지(58) 위(衛)나라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에서 일부 발췌 인용. 



B.C 559년에 대부 손임보(孫林父)와 영식(寧殖)를 쿠데타를 일으켜 헌공을 축출하고, 공자 표(剽)를 군위에 세웠었는데 그가 위상공(衛殤公)입니다. 위헌공의 어머니와 동생들은 제나라로 피난하고, 헌공 자신은 제나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기록에 손임보는 손문자(孫文子), 영식은 영혜자(寧惠子)로 많이 나옵니다. 


시간이 흘러 영혜자는 죽기 전에 자신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여 아들 영희(寧喜)에게 유언을 남깁니다. 영희는 위나라 정공의 대부로 영도자(寧悼子)로도 불리며영식(寧殖)의 아들입니다.  


 "내가 헌공을 위나라에서 내쫓았으니 내가 죽으면 그분을 다시 돌아오게 하라."고 했습니다. 


영식은 그렇게 말하고 죽었습니다. 제나라로 망명한 위헌공도 다시 본국으로 귀국하여 제위를 차지하고자 제나라를 비롯한 제후국들을 상대로 여러 차례 유세를 하며 복국 활동을 했습니다.  영희가 사람을 보내 위헌공을 찾아가 조정에 복귀하도록 의사를 전달합니다. 위헌공은 영희가 의심하지 않도록 거짓으로 사람을 보내 


"복국 후에는 국정에 관여하지 않고 종묘, 제사 등만 관장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국사는 모두 영도자에게 맡기겠다고 하자, 영도자는 매우 기뻐합니다. 이렇게 하면 아버지의 유언도 지키고 자신이 가진 권력을 잃지 않을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지요. 위헌공의 제안을 받고 즉시 그는 군신들을 소집하여 이 일을 의논했습니다. 


그러나 여러 사람들이 헌공의 복위를 극구 반대했고, 특히 우재대부는 헌공을 만나고 돌아와서 영희에게 


"국군께서는 비록 12년 동안 망명하셨지만 거친 위세는 조금도 변하지 않으셨으니 돌아오시게 되면 모두 죽게 될 것"이라고 강력히 권고합니다. 


또 대숙문자(大叔文子)도 이러한 소식을 듣고 영희의 우유부단한 태도를 탄식하며 


“군자가 행동함에도 그 종말을 생각하는 것이고 다시 그대로 행해서 좋은가를 생각하는 것으로 그는 군주 보기를 바둑 두는 일 같이도 여기지 않으니 그가 어떻게 화를 면하겠는가 바둑을 들고 놓을 곳을 정하지 못하면 상대를 이기지 못한다(擧棋不定, 不勝其偶) 그런데 하물며 군주를 모시는 일에 주관이 없는 데서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그러나 영희는 고집을 부리며, 위헌공이 귀국한 후에도 자신이 권력을 독차지할 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선친의 유언'을 핑계로 의사의 충고를 듣지 않고 위헌공을 귀국시키려 했습니다. 그후 위 나라 헌공은 복귀해 군주가 됐으며 영희는 대숙문자의 예측대로 헌공의 손에 죽고 말았습니다. 영씨 집안 전체가 도륙당함은 물론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각기득기소(各己得其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