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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엽 Jul 11. 2023

하루 바쁘게 잘 살았습니다

아침에 아내 출근길 태워주고 곧장 돌아와 집에서 대입수능 EBS 교재를 들고 인근 청소년 수련원에서 학교 밖 학생 지도 자원봉사활동을 하러 갔습니다. 혼자 공부할 방법이 여의치 않은 이 아이와 1:1로 과외하듯이 수업을 진행하는데, 매주 화요일 두 시간씩 준비하는 것이 만만치 않습니다. 특히 고전산문에서 낯선 고전 소설 작품은 저도 처음 접하는 지문이 꽤 있습니다. 아무래도 최근 대입수능에서 변별력을 높이려고 낯선 작품을 교재에 많이 올린 것 같습니다. 킬러문항인지 아닌지 여부는 이 학생에게 썩 중요하지 않은 듯합니다. 그저 낯선 지문을 이해하려면 전체 내용을 먼저 설명해주어야 하고, 충분히 파악했는지를 확인도 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간간이 질문을 하여 학생의 현재 수준을 알아야 합니다. 어쨌든  제 앞에서 공부하려고 있는 아이가 적극적으로 수업에 참여하여 참 보기 좋습니다. 


30여 년 고3 수능 문제를 다루었지만 그래도 아이들 대입 지도는 늘 부담스럽습니다. 외부에선 EBS 교재를 단순 반복한다 하여 폄하하는 기색도 있지만 막상 지도하는 제 입장에선 절대로 단순하지도 않고 쉬운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현직에 있을 때는 아이들 진도와 상관없이 매년 저 스스로 관련 문제집을 4~5권 같이 공부했습니다. 행여 아이들이 자신이 공부한 교재에서 낯설거나 난해한 문제에 봉착하여 질문하였을 때 제가 능숙하게 답하고 설명해 주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지요. 그래서 학생들 질문에 웬만한 것은 답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최상위층 학생들의 질문은 보통 교재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문제들이 아니어서 그들이 질문하면 바짝 긴장하게 됩니다. 오늘 지도하는 이 학생은 그 정도 수준이 아니지만 그래도 오직 저만 보고 따라오는 학생이라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습니다. 수강료도 일체 받지 않고 오직 봉사로 지도하지만 아이가 갖는 기대는 상당합니다. 학습 자세도 매우 적극적입니다. 


오전 2시간 대입수능 지도 자원봉사활동 후 빨리 집에 돌아와 점심 식사를 하였습니다. 마침 큰아들이 오늘 출근하지 않아서 요기 거리를 만들어주었습니다. 큰아들은 제가 대안학교에 가지 않은 날에는 집에서 그냥 쉬고 있는 줄 알았던 모양입니다. 갑자기 자원봉사활동에 간다니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제 능력이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혹시나 이 아이에게 도움이 된다면 큰 보람일 것 같습니다. 연말까지 최선을 다해 지도하여 높은 점수를 받게 해주는 것이 가장 큰 목표입니다. 이 아이에겐 교육의 거대 담론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공부에 노력을 쏟아 자신이 가고 싶은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중요하지요. 이 학생은 고교 2학년 때 일반계 고교를 자퇴하고 검정고시를 거쳤습니다. 아차! 학교 밖 아이니 학생이 아니네요. 그런데 막상 대입 수능 준비를 하는 것이 만만치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해당 시설에서 저에게 급히 요청하여 이렇게 1년 간 무료로 지도하게 된 것입니다. 무엇보다 학생이 워낙 열심히 공부하니까 저도 힘이 나고 보람을 느끼게 됩니다. 


큰아들이 준비해 준 점심 식사를 하고 곧장 색소폰 학원으로 갔습니다. 약 3시간 정도 열심히 연습하였습니다. 아직은 초보 단계라 쉽진 않지만 그래도 처음 왔을 때보다 많이 좋아졌다고 원장님께서 칭찬해 주시네요. 색소폰 학원 연습 마치고 집으로 급히 돌아옵니다. 아내 퇴근 시간이 촉박합니다. 아내를 태워 놓고 다시 집을 나섭니다. 지역 문화도시센터에서 진행하는 특강을 들으러 갔습니다. 국립해양박물관장님께서 오셔서 해박한 해양 관련 지식을 보이시며 우리 지역의 향후 진로에 대한 방향 제시와 함께 지역의 역사적 의미나 특징 등을 풍부한 자료와 함께 전개하였지요. 역시 관징님은 달랐습니다. 저도 이 지역에서 오래 살았지만 전혀 몰랐던 사실도 많이 배웠습니다. 참가자들의 질문과 대답 그리고 발표가 끝없이 이어지더군요. 예정시간보다 늦게 끝났습니다. 그래도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저도 뭔가 할 말은 있었지만 다음 시간으로 미뤘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질문과 대답을 듣는 것도 괜찮은 경험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루 종일 정말 바쁘게 생활하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빗길에 시내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길 바닷바람이 참으로 청량하였습니다. 


강연장에서 간식 용으로 받은 샌드위치는 먹을 시간을 놓쳐 가방에 넣어 오다가 아파트 경비실에 들러 할아버지 경비원께 드렸습니다. 한 쌍이라 댁에 가서 사모님과 나눠 드리라고 했더니, 받을 수 없다고 자꾸 사양하기에 완력으로 그 분 손에 강제로 드렸지요. 오늘은 밤 9시에 퇴근한다고 하셔서 잘 되었노라고 한 마디 건넸지요. 맨날 받기만 한다고 미안해 하시더군요.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제가 훨씬 많이 받는데도 말이지요. 환하게 미소짓는 그 분을 뒤로 하고 기쁜 마음으로 집에 옵니다. 


아내는 저에게 하루 종일 뭐 그리 바쁘게 사느냐고 슬쩍 놀립니다. 그래서 세세하게 대답은 하지 않고 그냥 배우고 싶은 것 배우고 듣고 싶은 강의 참여하면서 하루 하루 그렇게 살아간다고 답했지요. 하루 일과를 바쁘게 잘 마치고 책상에 가만히 앉아 딸아이가 미리 주문하여 냉장고에 넣어 둔 아이스 커피를 마시며 깊은 밤 바다를 바라봅니다. 노후 세대의 삶 이렇게 사는 것도 좋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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