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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엽 Jul 13. 2023

제 말 한 번 들어보이소

오전에는 대안학교 출근했다가 점심 식사 후 오후엔 지역 문화원에서 "동양고전 함께읽고 이야기나누기-사기열전(史記列傳)" 강의하기 위해 서둘러 나섰습니다. 그런데 1층 주차장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70대 퇴직께서 주차장 관리 일을 하고 계시는데, 오작동하여 차량 번호를 잘못 눌렀는가 봅니다. 그래서 다른 차량이 1층에 내려와 문을 열었더니  공교롭게도 그 시간에 기계 작동이 멈추고 불이 꺼졌네요. 차주가 와서 다시 시동을 걸어야 센스가 작동하는가 봅니다. 다행히 인명 사고는 없었지만 대기하고 있던 30대 가량의 젊은 커플이 주차장 관리원 할아버지께 모진 말을 쏟아내고 있었습니다.


"저 차가 저렇게 얼마나 있어야 저희 차를 뺄 수 있나요. 그런 거 제대로 처리하라고 월급 받는 거 아니예요. 1시간이나 있어야 된다고요. 지금 장난해요. 차주가 연극보고 있어서 연락을 할 수 없다니 무슨 일처리를 이런 식으로 해요? 무어라도 시도해 보세요."


그러자 주차장 관리원께서 한 마디 하시네요.

"제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제가 사무실에 전화밖에 할 수 없는데, 어쩌란 말입니까?"

그러자 그 젊은 커플의 언성이 더욱 높아집니다.

"아니 그걸 말이라고 해요. 당장 처리해 주세요. 지금 30분이 지났는데, 그냥 손도 쓰지 않고 언제 나올지 모르는 사람을 기다리라고 하면 어떡해요?"


제가 옆으로 슬쩍 가면서 할아버지를 저만치 끌었습니다. 행여 관리 할아버지가 젊은이와 언쟁을 할까, 혹시나 젊은이들에게 낭패를 겪을까 싶어서 제가 나섰습니다. 할아버지께선 조금 떨어진 곳에서 우리를 지켜보십니다.


"저 있지요. 저도 차 대기하고 있는데, 저 관리원도 어떻게 할 방법이 없는 것 같은데,  조금만 기다려 봅시다. 우리가 큰소리로 뭐라고 요구해도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좋게 좋게 이야기를 해서 연락할 방법을 찾아 보는 것이 좋을 듯해요. 저도 그 다음 대기 차량입니다. 오후 강의가 있어 지금 차를 꺼내도 아슬아슬합니다. 하지만 어찌할 수 없잖아요.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하니 할아버지 너무 뭐라하지 말고 살살 달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화가 나는 것은 충분이 이해하지만. "


젊은 커플이 이젠 저에게 불만 사항을 마구 쏟아냅니다. 지금까지 진행된 일에 대해 세세하게 설명해 주면서 주차장 시스템부터 근무자 자세까지 도무지 마음에 드는 것이 하나도 없답니다. 대신에 저에게는 막말에 가까운 언성은 보이지 않네요. 젊은 커플이 돌아가면서 어떨 때는 동시에 쏟아내는 말을 제가 넉넉하게 받아들었습니다. 그렇게 해야 할아버지가 곤란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 듯해서 말입니다. 마치 제가 건물 대표가 된 듯합니다. 그래도 대신 사과한다고 하면서 살살 달랬습니다. 어느 새 그들의 목소리도 차분해졌습니다. 그때 할아버지 관리원께 다시 한번 사무소에 연락해서 차주를 모셔오시라고 차분하게 부탁했지요. 어찌 어찌 하여 차주가 나타나고 젊은 커플은 BMW를 타고 떠났습니다. 떠나는 그 사람들에게


"오늘 화가 많이 나시겠지만 넉넉하게 풀고 가이소. 우리 관리하시는 할아버지도 얘를 많이 썼으니 너무 뭐라 카지 말고요. 알았지요. 조심해 가세요."


젊은 커플의 얼굴이 환해집니다. 그리고 저에겐 '감사합니다', 괸리 할아버지께는 '죄송해요' 란 말을 남기고 갔습니다. 그들이 가자마자 관리 할아버지께서 저에게 다가옵니다. 정말 고맙다고 하시면서요. 그리고 저를 붙잡고 하소연합니다.


"제 말 한번 들어보이소. 제가 여기 온 지는 얼마 안 되었지만 사람들 희한한 일이 정말 많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울컥 울컥합니다. 나이 먹어서 이런 곳에 와 있어서 당하는 것 같습니다. 저들은 좀전에 이 건물 12층 호텔에서 한 시간 즐기고 내려온 사람들입니다. 그 순간을 못 참고 저한테 모진 말을 막 쏟아내네요. "로 시작하여 한참 동안이나 넋두리를 펼칩니다. 저도 경청하면서 동조하였습니다. 그들이 호텔에서 내려오든 뭘 하든 그것은 젊은이들의 사정이니 이해하셔야 한다고 하면서 맞장구도 쳐주었습니다. 하고픈 말이 정말 많았던 모양입니다. 그분 말을 들어주다가 정작 제 인문학 강의 시간에 지각하여 수강생들에게 사과도 하고.


PS: 참 나오기 직전에 건물 바로 앞에 있는 커피 점에서 시원한 수박 주스를 얼음과 함께 하나 사서 드리며 할아버지를 위로했습니다. 이건 제가 정말 잘 한 것 같습니다. 할아버지의 표정이 순식간에 환해지십니다. "이렇게 얻어 먹어도 될랑가 모르겠지만, 참말로 고맙심더."하시네요. 잘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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