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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엽 Jan 01. 2023

손빈(孫臏)! 친구의 간계로 두 무릎이 잘리다

친구의 시기와 질투로 참혹한 형벌을 받고, 철저히 복수하다

          

춘추 전국 시절, 손빈(孫臏)과 방연(龐涓)은 주(周)나라 양성 땅에서 귀곡자(鬼谷子)를 스승으로 모시고 동문수학했다. 방연이 먼저 세상에 나와 당시 최강국이던 위(魏)나라로 들어가 총사령관 자리에 오른다.      

손빈도그 후에 방연이 벼슬하고 있는 위나라로 오게 되었다. 하지만 방연은 손빈이 자기보다 탁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위나라 안에서 자칫하면 자신의 지위도 빼앗길 수 있다는 걱정을 한다. 실제로 귀곡자 슬하에서 함께 수학할 때 방연은 손빈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래서 어떻게든 방연을 제거하려고 애를 쓴다.      




어느 날 귀곡자를 방문한 묵적(墨翟)이 귀곡자가 손빈을 칭찬하는 말을 듣고 돌아가 위나라 혜왕에게 손빈을 천거하였다. 그렇게 위나라에 온 손빈은 객경(客卿)이 된다. 객경이란 타국 출신 인물에게 정치나 외교 고문 또는 자문 역할을 맡기는 인재 등용제도다. 처음엔 객경으로 등용한 뒤 그 능력이 탁월하면 본격적으로 관리가 되어 조정에 출사하게 된다. 당시 전국시대 모든 나라가 세력 확장을 위해 객경을 도입하였지만, 특히 서쪽 변방 야만국가로 치부되던 진나라가 천하통일하는데 객경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대표적인 인물이 위(衛)나라 출신 상앙(商鞅)이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기 전에 상앙이 진나라의 중원 진출과 천하 통일의 기반을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손빈이 객경에 불과하지만 방연은 불안했다. 아주 사악하고 간특한 방연은 친구 손빈을 제거하기 위해 너무나 비열한 방법을 쓴다. 방연은 손빈이 가족과 연락을 주고받은 사실을 교묘히 왜곡하여 손빈을 첩자로 모함한다. 위나라 왕에게 손빈이 자기 고향인 제나라와 내통한다고 음해한 것이다. 그래서 위 혜왕은 방연의 말만 믿고 손빈을 형에 처한다.   

         

법으로 두 다리를 자르고 경형을 가해 숨어서 나타내지 않게 했다. 

              則以法刑斷其兩足而黥之, 欲隱勿見          


그런데 방연은 가증스럽게도 손빈 앞에 나타나 통곡하였다. 두 다리가 잘리고 이마엔 먹물로 죄인임을 표시하는 참혹한 경형(黥刑)을 당한 손빈 앞에서 통곡이라니. 그것도 자신의 흉계로 손빈이 처참한 형벌을 받았는데 말이다. 게다가 방연은 자신의 심복을 보내 손빈을 시중들게 했다. 시중이라기보다 감시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손빈이 선조인 손무(孫武)의 병서를 모두 외우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손빈으로 하여금 병서를 저술하게 하고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한 술책이었다. 손빈도 이때까지는 방연의 의도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오히려 친구 방연이 위혜왕에게 간청하여 자신의 목숨이라도 지켜 준 줄 알았다. 그리고 친구 방연의 요청에 따라 병법서 저술을 시작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손빈을 감시하던 시종이 손빈의 인품에 반해 방연의 술책을 모두 알려주었다.   


             

뒤늦게 친구 방연의 교활한 술책을 알았지만,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두 다리를 잃은 이런 몰골로 어떻게 방연의 감시를 뚫고 탈출할 수 있을 것인가. 손빈은 위나라의 수도 대량(大梁)을 방문한 제(齊)나라 사신을 비밀리에 찾아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자기를 구해 달라고 부탁했다. 사신은 손빈의 재능을 알아보고 몰래 자기 수레에 숨겨 제나라로 데려갔다. 당시 제나라 사신의 수레에 몰래 실려 조국 제나라 땅으로 오게 된 손빈은 대장 손빈은 곧 전기(田忌) 장군의 인정을 받아 그의 빈객이 되었다. 전기와 함께 병법을 논하면서 점차 친근해져 갔다.      



전기는 때마침 내기에 빠져 공자들과 경마를 즐겼다. 어느 날 손빈은 말 경주를 유심히 살펴보면서 필승 전략을 발견하게 된다. 당시의 경마는 네 마리의 말[駟]이 끄는 수레를 한 조로 해서 3개 조가 각각 한 번씩 차례로 세 번 경기를 벌이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3개 조의 말을 각각 비교한 끝에 속력 역시 上, 中, 下의 3등급으로 나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손빈이 전기에게 말했다.   

    

“장군의 제일 느린 하등 수레를 상대방의 가장 빠른 상등 수레와 달리게 하고, 

今以君之下駟與彼上駟

장군의 상등 수레는 상대방의 중등 수레와,

取君上駟與彼中駟

장군의 중등 수레는 상대방의 하등 수레와 달리게 하십시오.” 

取君中駟與彼下駟.     


손빈의 계책에 따른 결과 전기는 2승 1패의 전적으로 승리하였다. 무작정 승부하는 것이 아니라 치밀한 전략을 수립하여 경마에 임하게 한 점이 이채롭다. 이렇게 경마에서 승리하자 대장 전기가 손빈을 더욱 신임하고 나아가 위왕(威王)에게 천거했다.   

   

이런 가운데 기원전 354년에 벌어진 제나라와 위나라의 ‘계릉전투’에서 위혜왕이 장군 방연으로 하여금 조나라를 공격하게 하였다. 그러자 조나라는 제나라에 구원을 요청한다. 이에 제나라가 조나라의 요청을 받아들여 위나라와 전투에 참전하였다. 위나라 대군이 조나라 수도를 치고 있으니 제나라 조정 대신들은 주력군을 조나라 수도로 파별하려 했다. 그런데 손빈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계릉 전투 당시 제나라 위왕은 손빈을 장군으로 삼으려고 했으나 손빈은 자신이 형벌을 받은 사람이라고 하며 고사한다. 위왕은 전기를 장군으로 삼고 손빈을 군사(軍師)로 삼되, 손빈은 치거(輜車) 속에 앉아 작전 지휘를 하도록 했다. 

     



손빈이 말했다. 


“실이 엉킨 것을 풀려면 잡아당기거나 두들겨서는 안 됩니다. 싸움을 편들려면 덮어놓고 주먹만 휘두른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이 노리는 점을 가로막을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무방비 상태의 허점을 칠 때 싸움은 자연 풀립니다.      

夫解雜亂紛糾者不控捲, 救鬪者不搏撠, 批亢擣虛, 形格勢禁, 則自爲解耳.     


손빈의 방안은 이랬다.      

‘무작정 조나라에 쳐들어 갈 것이 아니라 위나라 수도 대량으로 가야 한다. 지금 위나라와 조나라가 전력을 다해 싸우고 있을 것이며 위나라 군사 대부분이 조나라에 있을 것이다. 그래서 정작 위나라 수도는 정예병이 아닌 노약자들만이 지키고 있다. 따라서 위나라 수도 대량을 신속히 공겨갛면 조나라에 있는 방연 군대가 대량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조나라도 구하고, 위나라도 국력이 피폐해질 것이다.’     


전기는 손빈의 계책을 받아들여 위나라 수도 대량을 공격하는 한편, 위나라 군대가 통과할 것으로 예상되는 계릉(桂陵)에 병사를 매복시켰다. 수도 대량이 위기에 처하자 방연의 위나라 군대는 과연 본국을 구하기 위하여 회군하기 시작했다. 위나라 군대는 급히 대량으로 달려가다 계릉에서 매복병에 당해 대패했으며, 방연은 패잔병을 이끌고 대량으로 달아났다. 이렇게 하여 조나라의 포위가 풀렸으니 이를 위위구조(圍魏救趙)라 한다. 위나라 도읍을 포위하여 조나라를 구한다는 뜻으로 손빈이 뛰어난 병법 실력을 천하에 떨치게 된다.      


     


계릉전투 13년 후에 이번에는 위나라가 조나라와 함께 한나라를 공격했다. 한나라가 제나라에 위급함을 알렸다. 이번에도 제나라 군은 전기를 대장으로 삼아 위나라 수도 대량으로 달려갔다. 전장터인 한나라가 아닌 위나라 대량 말이다. 위나라 군이 손빈의 군대를 공격해 오자, 손빈은 방연의 공격에 대해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번번이 도망치기만 하였다.     

 

이에 기세가 올라 손빈을 쫓던 방연은 손빈 군대가 머물던 숙영지의 아궁이 숫자가 첫날에는 10만 개, 이튿날에는 5만 개 그리고 사흘째엔 3만 개로 계속해서 줄어드는 것을 보고는 손빈의 군사들이 겁에 질려 탈영을 하고 있다고 판단한다. 이에 기세가 오른 방연은 손빈을 사로잡을 욕심에 보병은 버리고 가벼운 무장의 정예병과 함께 하루에 이틀 치 행군을 하며 제나라 군대를 급하게 추격하였다. 그러자 한나라와 싸우다 돌아온 위나라 군사들이 더욱 지치게 되었고, 보다 못한 상장군인 위나라 태자가 주의를 준다. 군사들이 지치면 전투에 불리하고, 어차피 제나라 군사들이 위나라 영토에 있으니 서두르지 말라고 충고한 것이다. 그러나 방연은 듣지 않았다. 지난 날 계릉 땅에서 손빈의 위위구조(圍魏救趙)에 철저하게 당했던 수치를 설욕하고 싶었다.  

    

손빈은 그런 방연의 마음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방연이 지휘하는 위나라 군대를 마릉(馬陵) 계곡까지 깊숙이 유도하였다. 그래도 귀곡자 아래에서 손빈과 함께 병법을 공부한 방연이지만, 손빈을 체포하여 계릉전투의 치욕을 갚겠다는 마음이 너무나 앞섰다. 마릉 계곡은 길이 좁고 지세가 험하여 대군이 한꺼번에 지나가는 것에 한계가 있었다. 손빈은 부하들로 하여금 나무를 베어 길목에 깔게 했다. 그리고 계곡 양쪽에 매복한 군사들에게 명령했다.      


“위나라 군사들이 오늘 밤에 이곳에 도착할 것이다. 너희들은 횃불이 켜지면 그 횃불을 향해 일제히 활을 쏘아라.”     


방연이 한 밤중에 그곳에 도착하자 나무들이 쓰러져 길을 막고 있는 것을 보고는 군사들을 시켜 얼른 그것을 치우게 했다. 그런데 군사들이 와서 나무 하나에 껍질이 하얗게 벗겨져 있고, 무슨 글자가 쓰여 있다고 보고한다. 방연이 괴이하게 여겨 옆에 있는 군사에게 횃불을 밝히게 한 뒤 그것을 읽었다.      


    龐涓死此樹下  방연이 이 나무아래서 죽다      

    



그때 사방에서 날아온 제나라 매복 군사들의 화살이 쏟아졌다. 위나라 군대개 괴멸 상태에 빠졌다. 위나라 후속부대도 제나라 군에게 기습을 당한다. 방연은 손빈에게 철저하게 속아 패하였음을 알고 스스로 목을 치면서 말했다.  

    

“결국 꼬마 녀석의 명성을 이루어 주고 말았구나.”

                           遂成豎子之名     



마릉전투 과정에서 손빈이 철수하며 펼친 전술은  감조유적(減竈誘敵)이라 한다. ‘아궁이 숫자를 줄여 적을 유인하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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