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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엽 Feb 19. 2023

흉노에 팔려간 궁녀, 왕소군(王昭君)

한나라와 흉노의 정략 결혼에 희생된 미인

                          

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


오랑캐 땅에는 꽃과 풀이 없으니

봄이 왔는데 봄 같지가 않구나.


     

중국 역사상 서시(西施), 왕소군(王昭君), 초선(貂蟬), 양옥환(楊玉環)이란 4대 미녀가 있습니다. 양옥환은 양귀비로 더 많이 불리는 그 인물입니다. 여기에선 왕소군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나머지 세 사람 이야기도 시리즈로 펼치겠습니다.      



왕소군의 별칭에 낙안(落雁)이 있는데, 기러기가 떨어진다는 뜻이지요. 조국 한나라에서 흉노로 시집갈 때 고향 생각에 비파를 연주했는데 이때 하늘을 날던 기러기가 구슬픈 비파 연주 소리와 왕소군의 처연한 아름다움에 기러기가 날개짓을 잊고 그만 떨어졌다는 말에서 낙안(落雁)이라는 고사성어가 생겼다 합니다.    

      

1980년 ‘서울의 봄’ 시절에 우리에게 익숙해진 한시(漢詩) 구절이 있습니다. “봄은 왔지만 봄 같지가 않다”라는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인데, 박정희 대통령이 1979년 10월 26일에 자신의 심복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죽임을 당하고, 이듬해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주도한 12.12쿠데타로 민주화에 대한 기대가 사라졌을 때 나온 말입니다. 18년 간 장기 군사독재 치하에서 신음하던 당시 국민들이 이제 진정한 민주주의 시대가 온다고 기대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지요. 전두환 군사독재가 노태우까지 이어집니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세 사람에 대한 평가는 여기서 논외로 하겠습니다.   

   

'서울의 봄' 당시 김종필 전 총리가 하수상한 정치적 상황에 빗대어 언급함으로써 이 시구(詩句)가 더욱 유명해졌다고 하는데, 그 출처가 바로 당나라 시인 동방규(東方虬) 소군원 삼수(昭君怨 三首)입니다. 김종필 씨는 신군부에 의해 가택연금을 당하고 부정축재자로 몰려 강제로 정계은퇴를 당하였습니다. 


동방규가 왕소군의 기구한 운명을 애달프게 여겨 지은 시가 바로 소군원(昭君怨)입니다. 왕소군의 원망이라는 뜻이 되겠지요. 그녀는 원래 한나라 황제의 궁녀였는데요. 궁녀의 초상화를 그려서 황제에게 바치는 화공(畵工) 모연수(毛延壽)에게 그녀만 뇌물을 주지 않았습니다. 이에 앙심을 품은 화공은 그녀의 모습을 실제와는 달리 못생기게 그렸고, 그 결과 황제는 그녀를 후궁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황궁에는 수천 명의 궁녀가 있었는데, 그 수가 너무 많아서 황제가 일일히 얼굴을 볼 시간이 없었겠지요. 그래서 화공으로 하여금 궁녀들 얼굴을 그려 화첩을 만들라 하여 그것으로 미희들을 간택하였습니다.       

    

위 그림은 조선 후기의 화가 표암(豹菴) 강희언(姜熙彦)의 <소군출색>(昭君出塞)이다 우상단에 "황사백초 여문비파애원지곡(黃砂白草 如聞琵琶哀怨之曲)이란 글이 적혀 있다.

             위  화제인 표암평(豹菴評)의 의미는 "모래먼지와 마른 풀도 비파에서 나오는 구슬픈 노래를 듣는              듯하다."  가 됩니다.  


한(漢)나라 원제(元帝) 시절에 북방 오랑캐(胡) 흉노(匈奴)의 세력이 강력해져서 궁녀를 요구하니, 황제는 초상화를 보고 못생긴 왕소군을 보내기로 결정하게 됩니다. 흉노의 왕인 호한야(胡韓耶)에게 시집가기 위해 왕소군이 궁을 떠나 흉노 땅으로 가던 날 황제가 직접 보니 그림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최고의 미인이었지요.      

황제가 극도로 화가 날 수밖에요. 그래서 뇌물을 받고 못생긴 궁녀들을 예쁘게 그리고, 뇌물을 바치지 않은 진짜 미인 왕소군을 추녀로 그린 궁중화가 모연수(毛延壽)를 처형해 버립니다. 하지만 왕소군을 보내는 아쉬움은 사라지지 않았지요. 그렇게 북방 추운 지방 흉노 땅으로 시집가서 흉노왕비가 되어 버린 왕소군이 고향의 봄을 그리워하던 그녀의 심정을 그린 시가 바로 동방규의 ‘소군원’입니다. 이 시에 ‘춘래불사춘’이 등장하는데, 김종필 씨가 이 구절을 인용하여 1980년대 당시를 빗대어 표현한 것입니다.     

     


 역사에 가정은 무의미한 것이겠지만, 궁중화가 모연수가 왕소군의 실제 모습을 그대로 그렸다면, 왕소군은 흉노 땅으로 강제로 가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면 궁중의 수많은 후궁들 중에 한 사람으로 사라져가지 않았을까요. 훗날 이백이나 동방규가 왕소군을 애처럽게 보고 시를 지었다지만 글쎄요.


소군출색도

  

    

한나라와 흉노 양 세력 간의 화친을 위해 오랑캐에게 팔려간 왕소군의 슬픈 운명은 훗날 수많은 문인들의 단골 소재가 되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중국 역사상 최고의 시인이라는 이백(李白)의 시가 있습니다. 


王昭君二首 

     

其一


漢家秦地月 한나라 시절 옛 진 땅에 떴던 달은

流影照明妃 그림자를 내려 명비를 비추네.

一上玉關道 한번 옥관도에 올라

天涯去不歸 멀리 멀리 떠나간 뒤 돌아오지 않네     

漢月還從東海出 한나라 달은 다시 동해에 떠오르건만

明妃西嫁無來日 서쪽으로 시집간 명비는 돌아올 줄 모르네

燕支長寒雪作花 연지산은 늘 추워 눈꽃을 만들고

蛾眉憔悴沒胡沙 미인은 초췌해져 오랑캐 모래에 사라지는구나.

生乏黃金枉畵工 살아선 황금이 없어 초상화를 잘못 그리게 하더니

死遺靑塚使人嗟 죽어선 청총을 남겨 사람으로 하여금 탄식케 하네     


其二   

  

昭君拂玉鞍 소군이 아름다운 옥안장을 얹어놓고

上馬涕紅頰 말에 오르니 붉은 뺨엔 눈물이 가득.

今日漢宮人 오늘은 한나라의 궁녀지만

明朝胡地妾 내일 아침엔 오랑캐의 첩이라네.

         

     

그리고 이백과 같이 당나라 시인인 동방규(東方虬)도 왕소군의 기구한 운명을 애달프게 여겨 소군원 삼수(昭君怨 三首)를 남깁니다. 



昭君怨 三首 


1

漢道方全盛 한도방전성

朝廷足武臣 조정족무신

何須薄命妾 하수박명첩

辛苦事和親신고사화친     

한나라는 바야흐로 전성기고

조정에 무신들이 가득건만

어찌하여 박명한 여인에게

고달픈 화친의 짐을 넘기는가     


2

掩淚辭丹鳳 엄루사단봉

含悲向白龍 함비향백룡

禪于浪驚喜 선우랑경희

無復舊時容 무복구시용


눈물을 감추고 궁궐과 작별하여

슬픔을 머금고 흉노의 땅으로 떠나네

흉노의 추장 선우는 기뻐하지만

소군의 낯빛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     


3

胡地無花草 호지무화초

春來不似春 춘래불사춘

自然衣帶緩 자연의대완

非是爲腰身 비시위요신


오랑캐 땅이라고 꽃과 풀이 없으랴만은

봄이 왔는데도 봄 같지가 않구나

저절로 옷 띠가 느슨해짐은

몸이 야윈 때문만은 아니라네

     

중국 4대 미인 중 한 명인 왕소군은 따지고 보면 한나라와 흉노 간의 정략 결혼에 희생된 것이지요. 혹자는 그렇게 말합니다. 겉으로 보면 고향 땅을 떠나 척박한 북방의 차가운 땅으로 가야하는 왕소군이 불쌍할지 모르나, 실질적으로 왕소군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흉노의 왕비가 되어 풍족한 삶과 대우를 받아 고국 한나라에 돌아오고 싶지 않았을지 모른다고. 그 속이야 알겠습니까만 어쨌든 왕소군 사례는 미인 측면보다 뇌물정치의 사례로 많이 언급됩니다.      


실제로 왕소군은 흉노 땅에 가서 매우 적극적으로 살았던 것 같습니다. 남편이자 흉노족 선우였던 호한야가 죽고, 전처의 아들 복주루와 재혼하게 됩니다. 유목민족에게 그건 허물이 아니지요. 남은 미망인과 자녀들을 건사해야 하는 유목민의 현실에서 말입니다. 그녀는 흉노족의 역사상 최초로 초원에 초등 교육시스템을 도입해서 훈족의 어린이들에게 다양한 방면의 중국 문화를 소개하고 교육의 기회를 만들어 주었고, 여인들을 위해서는 진보된 길쌈 기술을 도입했습니다. 당연히 흉노족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으며, 그녀가 생존했던 기간 동안 훈과 한나라 사이에 전쟁은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그녀가 흉노 땅에서 60년 동안 살다 생을 마감하자 흉노족은 그녀를 후하게 장례지내고 그녀의 무덤에 '푸른 무덤'이라는 의미인 '청총(靑塚)' 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흉노족의 입장에선 왕소군이 따뜻한 고향을 떠나 추운 북방에 들어와 살면서 항상 푸른 풀이 돋아나는 고향 땅을 그리워했을 것이라고 봤겠지요. 바로 그 이름 때문에 후일 그녀의 무덤에는 겨울이 와도 풀이 시들지 않는다는 전설이 생겼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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