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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엽 Aug 10. 2023

세상에 이런 인연이

밤늦게 국제전화 한 통이 부재중 전화로 떠 있습니다. 우간다에 사는 아이작Issac 목사님 전화입니다. 제가 전화를 받지 않으니 문자를 남겨두었네요. 제가 가르쳤던 졸업생 한 명이 몇 개월째 아프리카 여행을 하고 있는데, 우간다에서 한 달 생활하게 되었나 봅니다. 아이작 목사님이 부산 고신대학교에서 유학생활 할 적에 이 졸업생 어머니가 다니시던 교회에 정기적으로 오셔서 서로 알고 있었고, 그래서 아프리카 여행 중인 아들에게 아이작 목사님 댁에 가서 한 달 살 것을 추천했답니다. 그래서 우간다 수도에서 11시간이나 걸리는 아이작 고향 마을에 도착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아이작 목사님이 제 졸업생과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누다가 제 이야기가 나왔나 봅니다. 졸업생이 깜짝 놀라서 한국에 계신 어머니께 아이작 목사님과 저와의 친분 관계를 설명하더랍니다. 그리고 졸업생 어머니께서 정말 오랜만에 저에게 전화를 걸어 그 상황을 전해 주었습니다. 졸업생도 그 어머니도 정말 많이 놀랐답니다. 고교 시절에 너무나 착하고 조용 조용했던 막내 아들이 이렇게 세계를 장기간 여행하는 도전을 시도할 줄 어머니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늘 걱정만 된답니다. 그 와중에 이렇게 저와 인연이 있는 아이작 목사를 만나다니 정말 신기하지요. 저와 도대체 어떤 인연이 있었는니 물어보기에 제가 설명했지요.



지금부터 한 7년 전 일입니다. 아주 추운 겨울날 시내 남포동에서 잠깐 볼일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제가 사는 아파트 앞 버스 정류소에 웬 흑인 성인이 한 명이 서 있었습니다. 그 추운 날씨에 윗 슈트 차림이 더욱 춥게 보였습니다. 제가 차에 태워드리며 어디까지 가느냐고 물었더니 제 집 인근에 있는 고신대학교 학생기숙사로 간다고 하더군요. 제 집 앞이니 그분을 태우지 않으면 그냥 주차장으로 들어가 집에 갔겠지요. 그분을 태워 가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시에라리온에서 유학을 왔답니다. 이름은 JON! 시에라리온 그 나라에서 단 한 명만 온 것이지요. 훗날 유학을 마치고 돌아가 현지 목사가 되었답니다.


그래서 고신대학교 기숙사에 아프리카에서 유학 온 학생이 몇 명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총 11명이 있답니다. 그 숫자도 그때 그때마다 조금씩 다르답니다. 고신대학교에서 아프리카 선교활동 사업 일환으로 아프리카 각국에서 우수한 장학생을 선발하여 한국에서 유학하는데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까 여기 와 있는 아프리카 유학생들은 각국의 대표 학생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초에리트라고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고신대학교까지 짧은 거리를 달리면서 차안에서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었는데, 제 짧은 영어 실력으로 한계가 있겠지만 그럭저럭 의사소통하였습니다. 한국에 온 지 1년이 넘었지만 시내에 가서 저녁식사를 해 본 경험이 거의 없답니다. 고신대학교에서 생활비를 지원해 주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여 이곳 유학생들 대부분이 부산에서 양산까지 시내버스, 지하철, 다시 마을버스 등 몇 번이나 갈아타고 가서 쿠팡 물류 창고에서 밤새 물류 작업을 하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더군요. 그렇게 힘든 생활이지만 그들의 장래를 생각하며 꿈을 꾸었겠지요. 며칠 뒤 고신대학교 정문에서 다시 만나자고 약속하였습니다. 유학생이 몇 명 나올지 모르지만 한정식에 가서 대접하기로 약속하였습니다. 약속날 정해진 시간에 고신대 정문에 도착하니 흑인 남학생 네 명이 차에 올라탑니다. 해가 막 지고 밤이 되어 가는 시간에 흑인 넷이 올라타서 동시에 웃으니까, 차안에 하얀 치아들만 보입니다. 우습기도 했지만 꾹 참았습니다.


남포동에 꽤 유명한 한정식 식당에 미리 예약한 음식을 부탁했습니다. 그렇게 다섯이서 한정식을 먹기 시작하는데, 아이작이 오늘 이렇게 비싼 음식을 먹었으니 밖에 나가면 아프리카 우간다 민속춤을 거리에서 잠깐 보여 주겠노라고 말합니다. 결고 비싼 집이 아닌데 말입니다. 그들이 빠듯한 용돈 사정으로 가기 어려운 식당이었을 것입니다. 저는 '아이구 괜찮아요."라고 사양했지만 결국 식사를 마치고 부평동 야시장까지 걸어가는 도중에 길에서 그 민속춤을 잠깐 보여 줍니다. 케냐에서, 부른디에서, 시에라리온, 그리고 우간다 출신 아이작까지 넷이 정말 즐거워하더군요. 아이작의 간단한 민속춤을 본 행인들이 큰 박수를 보내옵니다.


부평동 야시장엔 사람들이 정말 많았습니다. 넷 모두 이런 장면은 낯설게 보이는가 봅니다. 어묵 가게에 있었던 에피소드입니다. 아이작이 어묵을 가리키며 이건 뭐냐고 물어옵니다. 어묵 일명 오뎅이지요. 일본어가 더 익숙한 단어입니다만 영어로는 도저히 안 되어 짧은 영어실력을 동원하여 한국어를 섞어 가며 열심히 설명해 봅니다.


"있잖아 물고기 fish, live in the sea, fish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뼈, bone 알제? 그걸 갈아야 하는데 '드르륵' 해서 만드는 거야. name 이름은 몰라 I don't know"


아이작이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세상에 고기 뼈를 어떻게 갈아서 먹는가 하고 말입니다. 갈다라는 영어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서 '드르륵'하고 소리냈더니 그건 어떻게 알아채더군요. 그래서 답답한 마음에 주인에게 물었더니 '피시 소시지(sausage) 아인교'라고 알려 줍니다. 아무래도 외국인 대상으로 자주 판매하니까 그 정도 단어는 알고 있었나 봅니다. 그래서 어묵을 피시 소시지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대형으로 한 박스를 사서 차에 실었습니다. 따로 요리하지 않아도 기숙사에서 간식용으로 가볍게 먹을 수 있는 어묵을 크게 한 박스를 샀더니 아이작과 그 동료들이 진짜 좋아하더군요.


그것이 인연이 되어 시골 장터까지 아이작 부부도 태워주었고, 아이작이 석사과정 졸업식하던 날은 지인과 함께 가서 축하금도 전해 주었습니다. 아이작 부부 결혼 기념일엔 지인과 함께 제 차로 경남 시골 마을까지 드라이브도 하고 선물도 꽃다발까지 전하며 축하해 주었습니다. 물론 얼마 안 되는 축하금도요. 유학생들이 공부 기간이 끝나면 그들끼리 저를 인수 인계하더군요. 아이작과는 그렇게 한 7년 인연이 되었습니다. 금년 3월 아이작이 우간다로 돌아갔습니다. 3년 전에 아이작과 대화를 하다가 자신의 고향 마을에 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다고 하기에 제가 뭘 도와줄까 했더니 문구 세트를 부탁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러면 아이들 문구 세트를 사기 위해 돈이 필요할 테니 얼마나 줄까 했지요. 그래서 당시 300달러를 주고 확인 영수증을 받았습니다. 애초에 받을 생각이 없었으니 영수증은 필요도 없었지요. 확실하지는 않지만 한화로 약 36만원 정도 되었습니다.


잠깐 고국에 돌아갔을 때 아이들 모집하여 짧은 프로그램을 실행하는데, 150명 예상했는데 실제로는 400명이 넘는 어린 아이들이 먼길을 걸어 아이작 교회까지 와서 참여하고 문구 세트 선물을 받아갔다고 하네요. 당시 사진을 보면 규모아 장난 아니더군요. 저 혼자 계속 후원하는 것은 무리고 지인들에게 소개를 하여 많은 사람들이 일시적으로 동참했었지요. 물론 단발성으로요.


그 다음엔 현금성 지원은 지속성이 없겠다 싶어서 염소를 사주기로 했습니다. 당시 우간다 아이작 마을 현지 염소 값은 마리 당 50달러였습니다. 제가 100만원을 주면서 염소는 현지에서 알아서 사람들에게 분양하고 3년 뒤에 100만원을 도로 갚되 이자는 2만원이라고 약정서를 썼습니다. 이 돈도 굳이 받을 생각이 없었지만, 너무 의타적이 될까 우려하여 그리 했던 것이지요. 그렇게 세월이 흘러 올해 3월에 우간다로 가기 전에 2월 둘째 토요일 제가 대표로 있는 단체의 월례회 저녁 식사 자리에 아이작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제 앞에 100만원을 내놓습니다. 돈에 때가 가득 묻었습니다. 그 돈이 어찌 아이작의 손때만 있었을까마는 5만원 지폐들마다 때가 많이 보입니다. 웬돈이냐 물었더니 3년 전 약속을 지키려고 다른 유학생들보다 두 배나 아르바이트를 했답니다.


세상에! 그 약속을, 3년 전에 했던 그 약속을, 안 갚아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 그 약속을 지키려고 그렇게나 고생했을까. 우간다에 가면 귀여운 아들 딸 그리고 부인 나아가 부모님 형제들이 기다리고 있는 고국에 돌아가기 직전까지 약속을 지킨다고 그리 무리하다니.


그 돈을 받자마자 다시 돌려주면서 우간다에 도착하면 이 돈으로 땅을 얼마나 살 수 있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이작이 'Why?"라고 되묻고선 1헥타르 약 3000평을 살 수 있답니다. 그 땅을 사면 지역 아이들 교육 프로그램을 실행할 수 있는 큰돈이라고 답합니다. 그래서 이 돈 다시 가져가서 그 땅을 사라, 그리고 땅 명의는 저로 하고 운용은 아이작 가족이 알아서 하라고 했지요. 아이작이 흔쾌히 그렇게 하겠노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월례회에 참여한 우리 회원들께 사연을 소개했습니다. 회원들이 저에게 오히려 큰 박수를 보냅니다. 그리고 여기 저기서 자기도 후원하겠다고 돈을 내놓습니다. 아이작이 고마운 마음으로 그 돈을 받고 그렇게 우간다로 돌아가서 현지에서 목사님으로 목회활동을 하며 지역 아동 교육 프로그래을 실행하고 있다는 사진과 글을 보내왔었습니다. 단, 토지 명의는 외국인에게 줄 수 없다는 국가 정책도 함께 설명하면서 말이지요. 그래도 괜찮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길고 큰 인연이 있던 아이작 고향 마을 집에 제 졸업생이 한 달 간 현지 생활을 하게 되었다니 세상에 이런 인연이 또 있을까요.


아이작이 저에게 꼭 한 번 우간다에 다녀가라고 합니다. 자신이 실행하고 있는 현지 아이들 교육 프로그램도 봐주고, 한 6개월 정도 생활하다가 돌아가라고 하네요. 그런데 왕복 비행기 값만 해도 220만원 정도 되기에 부담이 되어 못 가겠더군요. 한번 간다 간다 해놓고선 이렇게 시간이 흘러갑니다. 그리고 국제 전화 끝에 내가 그곳에 가면 도대체 6개월간 무엇을 하며 생활하는가를 물었더니, 아이작 목사가


"Farming, far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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