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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엽 Aug 09. 2023

손도 한번 안 잡은 첫사랑

시골에서 초중학교를 마치고 연합고사를 치른 뒤 대구 시내로 진학하였습니다. 남녀공학이었던 중학교가 한 학년 학급 수가 4class여서 총 12반이고 각 학년 1~2반이 남학생, 3~4반이 여학생반이었습니다. 확실하게는 모르지만 한 반 50명은 넘었던 것 같습니다. 대구 시내 연합고사에 우리 중학교에서 6~7명 정도 합격했으니 당시에 제 자부심은 굉장했습니다. 그렇게 대구로 가기만 하면 대한민국 어느 대학이든 합격할 것이란 착각도 했었지요. 지금 생각해도 정말 낯뜨거운 착각이었습니다. 중학교 졸업하고 대구고등학교를 다닐 때 통학을 많이 했습니다. 


고향 마을 달성군 논공면 위천1동 우나리에서 대구 서부정류장, 일명 성당주차장까지 24km 그리고 시내 버스로 바꿔 탑니다. 대략 기억에 1번, 126번 127번 버스를 많이 탔습니다. 성당주차장엔 고령이나 현풍 방향에서 들어오는 시외버스를 타고 들어오는 통학생으로 그야말로 북새통이었지요. 거기서 시내버스로 바꿔 타면 30분 정도 달려 대명동 영남대학교 캠퍼스와 붙어 있었던 대구고등학교에 도착합니다. 교문 앞이 가파른 언덕이라 뛰어올라가면 비록 짧은 코스라도 숨이 찹니다. 그렇게 멀리서 통학을 하고 시외버스에 시내버스를 갈아타면서 학교를 다녔지만 지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교문을 통과하면 야구부가 있어서 운동장이 정말 광활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시골에서 통학하기가 만만찮은 거리였지만 그래도 잘 견뎌냈습니다. 통학 버스 안에서 온갖 에피소드가 있었습니다. 주로 남녀 학생들 사이의 해프닝이었지요. 버스 뒷쪽엔 불량기 줄줄 흐르는 남학생들이 히히덕거리며 진치고 있었고, 조신한 여학생은 앞쪽 좌석에 앉거나 가방을 앞쪽으로 두손에 모아든 채 그냥 서서 차창만 바라보며 미동도 하지 않았지요. 용기 있는 남학생들이 여학생에게 접근하여 집주소나 집전화 번호를 알아내 저희들끼리 사귀기도 했었지요. 그런 시절이 참으로 그립습니다. 그렇게 잠깐 시골에서 통학하다가 대구 시내에서 하숙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도회지 생활에 접어들었던 것 같습니다. 시골에서 밤을 보내고 새벽을 맞이 하던 생활에서 눈만 뜨면 번화한 도시를 보며 생활하기 시작했지요.  



어쩌다 토요일 잠깐 시골집에 들러 집안일을 도우고 일요일 저녁이면 다시 대구 하숙집으로 가는 시외버스에 올랐습니다. 일 주일만 있으면 집으로 오는데도 어머니는 동구밖 버스 정류장까지 따라 나오셨습니다. 어떻게 마련했는지 가방에 용돈을 넣어주십니다. 교복 주머니에 넣어 주시기도 했습니다. 저에 대한 염려가 왜 그리 많았던지 여러 가지 말씀을 해주십니다. 제 가방을 꼭 끌어안고 동구밖 길게 난 길을 따라 걸어와 저녁 해거름 무렵에 배웅을 해주셨습니다. 어떤 때는 어머니와 조금 더 있다가 온다고 밤늦게 대구로 가는 시외버스를 타기도 했는데, 늘 어머니와 둘이서 버스 정류장까지 걸었습니다. 제가 가방을 달라고 해도 누가 뺏어가기라도 하는 양 어머니께선 제 가방을 품속에 꼭 끌어안은 채 같이 걸었지요. 지금도 고향 마을 입구에 난 그 길을 따라 걸으면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북받쳐 오릅니다. 



그렇게 일요일 저녁이나 밤에 제가 대구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동구밖 길을 걸어나올 때 동네 집안 형수님이나 아지매를 만나면 어머니는 더욱 환한 미소로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그렇게 정류장까지 도착해도 아직 버스가 도착하지 않았기에 정류장에 나란히 서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하숙집 주인께도 드릴 뭔가를 싸서 꼭꼭 챙겨주셨습니다. 그리고 어머니께서 주신 돈은 당시 제 생활에 비추어 봐도 거액이었습니다. 낭비를 거의 하지 않았던 저에게 큰 돈이라 다 쓰지도 못하고 다시 어머니께 갖다 드리기도 했습니다. 



온가족의 기대를 받고 대구 시내에서 하숙했지만, 성적은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습니다. 본격적인 공부는 2학년 초부터 시작했습니다. 이유는 잘 모르지만 고2부터 학교 공부에 흥미가 생겼고,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정말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아쉬운 것은 1학년 때 대충 보낸 시간들이었습니다. 그중에 하나 고교 1학년 여름방학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여름방학 시작하자마자 시골집에 내려왔고, 첫날부터 수박밭 원두막에서 수박 서리하러 오는 사람을 감시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낮에는 수박밭까지 와서 수박을 사러 오는 사람들에게 장사도 하고 강바닥에 난 풀밭에 암소를 풀어놓고 소뜯기기도 하였지요. 간간이 수박밭 고랑에 난 풀을 뽑기도 하는 등 바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고1 여름방학 어느 날 원두막에 수박을 사러 온 여학생과 눈이 딱 맞았습니다. 세상에 태어나 전혀 모르는 낯선 이성과 처음 만났기에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습니다. 단 둘이 만난 것이 아니라 수박밭 원두막에 모여 있던 고향 마을 후배들 앞에서 만났습니다.  강바닥 풀밭에 매어 놓은 우리집 암소를 풀어 풀이 많은 곳으로 옮기기 위해 저만치 내려 가 있던 참에 그 소녀가 원두막까지 와서 수박을 사러 왔다고 했습니다. 당시 원두막에는 고향 마을 후배들이 7~8명 정도 모여 있었습니다. 상품 가치가 떨어지는 수박 몇 덩이를 내놓아 후배들이 먹을 수 있게 대접했습니다. 상품성이 높은 비싼 수박은 벌써 대구 칠성시장 경매장에 보냈고요. 원두막에서 강바닥 쪽으로 후배들이 저를 부릅니다. 


"히야. 수박 사러왔다 빨리 와 봐라."


저는 당연히 어른이 수박 사러왔다고 생각했지요. '형아'를 경북 달성군에선 히야라고 발음했는데, 히에 옛이응이 들어간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음가 있는 이응 말이지요. 그렇다고 '힝야'라고 부르진 않지요. 경상도 사람들은 알 겁니다. 어떤 발음인지 말입니다. 


그렇게 서둘러 원두막에 도착했더니 웬 여고생 한 명이 잔잔히 미소를 띠고 서 있습니다. 긴 치마에 윗옷 그리고 연한 하늘색 스카프로 머릿결을 뒤로 묶었지요. 머리핀이 두 군데 꽂혀 단정한 머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살짝 웃는 고운 눈매가 인상적이었고 무척 착하게 보였습니다. 남자들만 우글 우글 모여 있는 곳에 여학생이 혼자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저를 바라보고 서 있으니 오히려 제가 당황스럽더군요. 그리고 그렇게 처음 보는 순간 마음에 쏙 들어왔습니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 만난 이성이었으니까요. 중학교가 공학이고 매일 여학생을 보긴 했지만 사랑의 감정은 거의 못 느꼈지요. 한 순간 서로 말을 잃었습니다. 멀리 강바닥 풀밭에 제가 있을 때는 후배들이 그렇게 입을 모아 큰소리로 저를 불러놓고 막상 제가 그 여학생과 마주 섰을 때는 모두들 원두막 위에 올라가 우릴 둘을 내려다보며 침묵을 지킵니다. 일순간 저도 그 여학생도 대화가 끊겼습니다. 가득 쌓인 수박도 많이 있으니 그중에 하나를 골라야 할 텐데 그 여학생은 가만히 서 있고, 저는 저대로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그래서 아무 거나 하나 들고 앞장 섰습니다. 그 자리를 빨리 벗어나야 하기 때문이었지요. 그 여학생도 뒤따랐습니다. 저와 그 소녀 사이는 2~3m 정도로 강변 둑길을 따라 죽 걸었습니다. 7월 태양이 타오르는 여름 하늘 아래, 교련복 하의와 상의 하얀 메리야스를 입은 남학생이 큰 수박을 앞으로 가득 안은채 앞장서고 조신한 여고생이 뒤따르는 풍경은 지금 생각해도 한 폭의 그림 같습니다. 


뒤따라 오면서 여학생이 몇 가지를 물었고 그때까지 긴장했던 저는 그 소녀의 말을 잘 못 알아들었습니다. 대충 이런 대화가 오갔습니다. 


"혹시 저 영이 아세요?".

"누구요? 영이 잘 모릅니더."

"영이는 그쪽을 안다 카던데예."

"저는 영이 모릅니더. 잘못 알은 것 같네예."

"이상타, 영이는 분명 안다 캐서 물어 봤는데, 이상타."

"그캐도 저는 영이가 누군지 잘 모릅니더."


그렇게 둘이 잘 안 통하는 대화를 하다가 둑길 끝 무렵까지 왔습니다. 저쯤 밭에서 그 소녀의 어머니가 우리 둘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습니다. 저는 그냥 고개 숙이며 인사를 한 다음 쌩하고 돌아섰습니다. 뒤에서 소녀와 어머니가 뭐라고 했던 것 같은데 걸음을 재촉하여 우리 수박밭으로 급하게 돌아왔지요. 워낙 쑥스러워 수박값을 받지 않고 그냥 왔습니다. 마을에 그 일이 소문났습니다. 


"여학생 만나 얼마나 좋았던지 수박값도 안 받았다 칸다." ㅋㅋ.


당시 그  소녀와 같은 여고를 다니던 우리 외사촌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한 마을에 살던 큰외삼촌 딸입니다. 그 아이 이름이 영주였고,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영' 외자로 개명했다는 사실을 뒤에 알았습니다. 사촌이 그 소녀의 이름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 이름 석자는 제 고교1학년 삶을 지배했었지요. 시골집으로 편지를 두 번이나 보냈지만, 감감무소식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군복무 입대 사흘 전에 고향 마을 시골집에 잠깐 찾아와 얼굴을 보았지요. 시골집 마당에서 마을 친구들, 후배들 대학 써클 친구들 인근 마을 친구들 그렇게 4~50명이 모여 밤늦게 새벽까지 송별식을 하던 날에 어떻게 알았는지 그녀가 오후에 우리집에 잠깐 들러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모양입니다. 들에서 농삿일을 도우고 저녁 무렵 집에 오니 어머니가 그녀의 방문을 알려주었습니다. 돌아가신 어머니께서도 그녀를 보자마자


"색시가 참하다. 진짜 참하데이. 우째 그리 곱게 생겼노."


라며 무척 마음에 들어하셨지만, 군입대 사흘 앞둔 저에게는 어떻게 해볼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시는 군에 가면 모든 것이 무너지는 절망적인 시간으로 인식되었기에 도저히 책임질 수 없다고 생각했지요. 옅은 분홍빛 투피스를 곱게 차려입은 그녀가 이젠 스물 두 살이 되어 시골 마을 우리집까지 찾아온 것이지요. 정말 짧은 순간 대화를 나누고 그녀를 오토바이에 태워 그 동네까지 태워다 주었습니다. 우리 마을 다음 동네가 그 마을이라 그리 멀지는 않았습니다. 비포장도로를 달려 그 마을까지 두 사람이 주고 받은 한 마디는 뒤에 앉아 제 허리를 꼭 안은 그녀가 볼을 제 등에 살짝 기대며


"이렇게 가지만, 오늘 이 순간은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 같아요."


뿐입니다. 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토바이 속도만 올립니다. 분홍색 투피스를 입고 오토바이에 한쪽 방향으로 두발을 모은 채 제 등에 볼을 기대고 허리를 꼭 안은 그녀도 꽤나 불편했을 겁니다. 하지만 얼른 그 집 앞에 도착하여 무사히 내려 놓는 것만 생각하고 달렸습니다.



더 이상 특별한 일이 없었는데, 제 평생 삶에 첫사랑은 바로 그 소녀였습니다. 군입대, 제대, 대학 졸업. 교직 그리고 결혼 등으로 착착 정해진 것처럼 평탄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냥 마음 속으로만 생각하는 첫사랑이었던가 봅니다. 


오늘따라 어린 시절 추억을 떠올리다 보니 손 한번 안잡은 첫사랑도 있을 수 있을까 자문해 봅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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